상태좋음
크기:19*28.5센치
보외1층앵글54상3
**남수문[南秀文, 1408(태종 8)~1442(세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경질(景質)이었는데 후에 경소(景素)로 고쳤으며,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남금(南琴)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그의 용모는 선인(仙人)에 비할 만하고 기상은 추응(秋鷹)에 비할 만하고 효행과 호학(好學)은 안회(顔回)와 증삼(曾參)에 비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세종 때(1426년) 사마시(司馬試)와 정시(庭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1435년 중시(重試)에서는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세종의 배려로 호당(湖堂)에 사가독서하였다. 문장에 뛰어났다. 성리서(性理書)에 근본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여, 학문으로는 당대의 독보적인 인물로 꼽혔다. 신석조(辛碩祖)·권채(權採)·유의손(柳義孫)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에 뽑혀 이름을 나란히 했다.
『고려사절요』의 초초(初草)를 비롯해 수많은 글을 남겼다.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극찬하여, "태산백두의 자질에 소강절의 학문으로, 그 조예와 실천은 옛날의 대 현인에 양보하지 않는다[山斗之材, 康節之學, 造詣實踐, 不讓古大賢]"라고 하였다. 또한 이자(李耔)도 "남수문은 뛰어난 군자로서, 그 글을 말하면 성당의 수준에 이르러 만당을 넘어섰고, 그 도를 말한다면 여동래와 장남헌이 그보다 조금 낫지만 황간이나 채원정이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에게 몇 해가 더 허락되었다면 그 진보를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南敬齋, 賢君子也. 語文, 盛唐而非晩, 語道, 東萊南軒稍右, 而黃蔡不及也. 倘假數年, 其進不可量矣.]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애석하게 요절하였다. 윤회(尹淮)와 더불어 술을 좋아하여 세종이 세 잔으로 제한할 것을 경계한 에피소드가 있다. 고향인 옥천(沃川)에서 활동하였다. 호계사(虎溪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행적은 「가장」(家狀), 송명흠(宋明欽)의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 등을 참고할 수 있다.제품소재 | 상품페이지 참고 |
---|---|
색상 | 상품페이지 참고 |
치수 | 상품페이지 참고 |
제조자 | 상품페이지 참고 |
세탁방법 및 취급시 주의사항 | 상품페이지 참고 |
제조연월 | 상품페이지 참고 |
품질보증기준 | 상품페이지 참고 |
A/S 책임자와 전화번호 | 상품페이지 참고 |
사용후기가 없습니다.
상품문의가 없습니다.
현재 옛날물건 쇼핑몰에서는 동일 주문건에 대해서 수량 상관없이 3,000원 이며 주문금액이 100,000원 이상이면 무료 배송 됩니다.
배송지역이 도서 산간지역이거나 일반택배 부적합 상품의 경우 추가 배송비가 청구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담당자가 전화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옛날물건 쇼핑몰에서는 로젠택배를 이용 합니다.
주문 시 배송비 문제가 발생하면 옛날물건 담당자에게 전화 주십시오.
입력된 교환/반품 정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