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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李睟光, 1563년 3월 14일(음력 2월 20일) ~ 1629년 1월 19일(음력 1628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 저술가이다. 왕실 종친의 후손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밑에서 병조좌랑, 안변부사, 순천부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공조참판, 이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신으로 세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관리로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모두 치렀다.조선 후기 실학을 등장을 이끈 실학의 선구자이며, 남인 실학 세력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3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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