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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5상3
**고려의 중신.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ㆍ백암(白巖)ㆍ일가도(一可道). 본관은 황려(黃驪). 목사 천백(天白)의 아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ㆍ수찬(修撰)을 거쳐 우왕 때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耽羅 : 제주도)에 건너가서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에 귀순하게 되었다. 1389년 창왕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소를 올려 전제(田制)의 폐를 논하였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ㆍ초(彝ㆍ初)의 옥으로 이색(李穡)과 같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수재로 석방되었다. 경연참찬관(經筵參撰官)ㆍ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 판서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가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하자 소를 올려 영규를 만고의 흉인으로 몰았다.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醴泉洞)에 숨어 살았는데 태조가 교유(敎諭)의 글을 청탁하였으나 병을 이유로 쓰지 않았으며 조영규의 탄핵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귀양가 그 곳에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ㆍ야은(冶隱) 길재(吉再)와 왕래하며 지냈는데 태조ㆍ태종이 수차 조정에 나오도록 간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문집이 몇 권 있으며, 아들 적(逖)도 벼슬에 오를 것을 거부하였으나 행은 자기와 입장이 다르므로 출사할 것을 권해 뒤에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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