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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3-1-2
**後識: 歲甲辰(1964)...琴宗燮
**조선 전기 지대구군사를 역임한 문신.
금유는 세종 때 대구군사로 부임하여 치적이 있었으며 관아에 금학루를 건립하였다.
금유의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청원정(淸遠亭), 아버지는 고려 때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담양군사(知潭陽郡事)를 역임한 금극해(琴克諧)이다. 아들은 승문원교리 금이영(琴以詠)이다.
금유는 1396년(태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동현감·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고, 1425년(세종 7) 무렵에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부임하였다. 금유는 재임 중 대구군 관아 객사 동북쪽에 금학루(琴鶴樓)를 건립하였다. 금학루는 안동의 영호루(暎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에 버금가는 대구를 대표하는 누각이었다. 금학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였다. 당시 인동현감으로 있던 김조(金銚)는 「금학루기(琴鶴樓記)」에서 금유가 백성을 잘 다스려 예가 되살아나고 덕을 숭상하는 풍조가 넘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금유의 지방관으로서의 풍모는 대구군의 아전 배설(裵泄)이 만년에 사람들에게 “전후의 수령들은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와 옥고는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하였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금유는 이후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금유의 저술로는 『청원정실기(淸遠亭實紀)』가 있다. 남지(南智) 등과 함께 『영남지리지(嶺南地理誌)』를 저술하였으며,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이라는 금학루에 관한 시를 남겼다.
금유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오봉산(五鳳山)에 있다. 묘갈명은 1879년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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