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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1층125상1
**김병린
1861년(철종 12)∼1940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겸응(謙膺)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경상남도 창원시(昌元市) 동면(東面) 화목(花木: 일명 곡목(曲木)) 출신이다.
금산공(琴山公) 김귀(金龜)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회와(悔窩) 김시보(金時普), 조부는 김만주(金萬胄)이고, 부친은 염산(廉山) 김찬원(金璨元)이다. 모친은 부친의 첫째 부인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부인은 노상하(盧相夏)의 딸 광주노씨(光州盧氏)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7세에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후 학업에 열중하였다. 8세에 모친을 여의고 자신보다 11세 많은 계모(繼母)를 극진히 모셨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글을 읽으면서 동생들을 보살폈다. 31세에 향시(鄕詩)에 응시하였지만 문란한 과거 제도를 보고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당시 퇴계의 ‘이기설(理氣說)’을 심화시켰으며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상곡(上谷) 서락서당(書洛書堂)에서 강학하던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性理學)에 매진하였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로는 안효제(安孝濟)를 비롯하여 이병희(李炳憙)‧조용섭(曺龍燮)‧허채(許埰) 등이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동지들과 중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강하게 저항하였으며,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하자 출입을 삼가고 후학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4년 마을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나 일본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자 마을 사람들은 도망갔으나 그는 자리를 지키며 선비의 도리를 지켰다.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말을 아끼기 위해 호를 ‘눌재(訥齋)’라 짓고, 말을 아꼈으나 불의를 보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마을의 용계서당(龍溪書堂)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1녀를 두었는데 권유범(權裕範)에게 출가시켰으며, 조카 김종하(金鐘河)를 후사로 삼았다.
묘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이북면(二北面) 어병산(御屛山)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후학들이 세운 ‘눌재김선생유허비(訥齋金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1937년에는 『김해김씨세적(金海金氏先蹟)』을 자신이 직접 지은 중간서문(重刊序文)과 김시찬(金時瓚)의 발문(跋文)을 붙여 편집 간행하였다. 유고로 『용계아언(龍溪雅言)』이 있는데, 석판본 1책으로 변영만(卞榮晩)의 서문(序文)과 김종하(金鍾河)의 발문(跋文)을 붙여 1954년 간행되었다.
그의 또 다른 유고 『눌재집(訥齋集)』에는 『용계아언(龍溪雅言)』에 없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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