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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산청간행 목활자본 곽세건(郭世楗) 무위자선생유집(无爲子先生遺集)1책완질(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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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산청간행 목활자본 곽세건(郭世楗) 무위자선생유집(无爲子先生遺集)1책완질 상태좋음 보54-2 **序: 歲甲戌(1934)...河謙鎭 跋: 乙亥(1935)...郭柱洪 **1659년 조선 17대왕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1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삼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당시 서인들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은 효종이 조대비에게는 둘째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다고 했으나 허목(許穆) 윤선도 등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결국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서인이 승리하였고, 남인은 예의에 어긋났다는 비난과 함께 대거 정계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이 논쟁을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기해예송이 끝난 후인 1673년 현종은 국가에 재해가 잇따르자 선비들에게 대책을 물었는데, 이때 영남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상소를 올려 국가의 재난은 자의대비(조대비) 복제의 잘못으로 재해가 초래되었다고 하며, 당시 일을 주도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실랄하게 공격을 했다. 초야에 묻혀 있던 한 유생이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영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것도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잘못을 지적했으니, 보통 사람의 기개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대쪽같은 성품을 가진 선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영수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영남 선비 곽세건은 진주 선비였다. 그는 1618년 현풍 솔례마을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싸우러 가다가 중도에 화의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은거하기가 적합한 지리산 동쪽에 있는 진주 대각리 대우촌(현재 진주시 수곡면 대각마을)으로 이주를 했다. 본관은 현풍(玄風)여며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이다. 조부인 곽재기는 계공랑(啓功郞)을 지냈으며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친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형을 따라 창의하여 왜적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 무위자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으며, 품은 뜻이 컸다. 자라서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하였고, 허목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고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 의리(義理)에 관한 일로 논란이 있으면 “선비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진실로 의리가 분명함을 얻기 위해서인데 불 속인들 두려워 하겠는가”하며 남보다 앞장을 섰다. 당시 조정에선 당론이 갈라져 상호 반목을 하고 있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또 다시 예송이 발생했다. 즉 실질적으로는 둘째 아들인 효종의 부인을 큰아들의 부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작은 아들의 부인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다. 논쟁의 결과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되었고, 서인들은 예를 그르쳤다 하여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보내는 등 예를 논의한 여러 신하들은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그대로 조정의 권한을 잡고 있었고, 또 현종의 지문(誌文)을 짓는 일을 맡고 있었다. 무위자는 송시열을 또 다시 탄핵을 한다. “돌아가신 선왕이 잘못된 예를 바로 잡았는데 이러한 선왕의 행적을 바로 쓰려면 자기의 죄를 자수해야 하고 선왕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리면 선왕의 거룩한 덕이 인멸될 것이니 송시열이 이 글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사악한 논리에 추종한 김수흥은 오히려 귀양을 갔는데 사악한 논리를 맨먼저 지어낸 송시열만이 유독 벌을 받지 않으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 상소는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우암측 기록을 통해 보면 “1677년 71세. 새로 등위한 숙종은 선생에게 현종의 묘비분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자, 신은 이미 선왕께 죄를 짓고 있는 터에 어떻게 비문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였다. 이때 경상도의 선비 곽세건이가 선생의 치죄(致罪)를 상소함을 계기로 거세되었던 남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호응하자, 서인측이 이에 대결하게 되자 숙종은 이에 남인들에 편승하여 이해 12월에 선생을 유배(流配)키로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니 당시 무위자의 상소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상소로 인해 숙종은 무위자를 사옹원봉사(司甕院奉事)로 특별히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고, 그뒤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윤휴의 천거로 형조좌랑에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1677년 익산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들이 재집권을 하고 허적(許積)·윤휴 등이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4년동안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지 2년 만에 죽었다. 향년 69세였다. 무위자는 겸재 하홍도의 학문이나 덕행이 남명 선생을 모시고 있는 덕천서원에 배향할만하다고 임금에게 청원한 상소를 했으며, 글이 문집에 실려 있다. 무위자의 상소들은 대부분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공격한 것이므로 이후로 서인들의 핍박을 받아 그의 후손들은 거의 몰락을 하게 되었다. 수곡에 후손들이 일부 살고 있는데, 선조의 학덕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9대손인 곽승렬씨(하동 횡천농협 전무)는 “초야에 묻힌 선비로 당시 집권당 영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안되는 일이지요. 무위자께서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실행을 한 선비입니다”며“하지만 후손들이 선조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것같아 부끄럽다”며 기자를 묘소로 안내를 했다. 덕곡재: 무위자의 학덕을 기리는 재실.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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