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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이현일(李玄逸) 홍범연의(洪範衍義)권18,19 1책(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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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이현일(李玄逸) 홍범연의(洪範衍義)권18,19 1책 상태좋음 크기:31.3*21.3센치 보21-3-3 **1627(인조 5)∼1704(숙종 3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으로 참봉 이시명(李時溟)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로 외조부 장흥효의 문하에서 퇴계학파의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인조 24년(1646), 1648년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갈 뜻이 없어 복시를 포기하였다. 효종 3년(1652) 중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고,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상소에 참여하였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은 숙종 즉위년(1674)부터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다가 1678년 공조 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암명되어 비로소 출사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향리에 은거하였다가,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여 성균관 사업, 사헌부 장령,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때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논하고 사직서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어 성균관 좨주(祭酒)를 거쳐 대사헌에 올라 인현왕후의 보호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용납되지 않아 분황(焚黃)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1690년 이조 참판, 세자시강원 찬선, 대사헌, 이조 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92년 다시 대사헌, 병조 참판, 우참찬, 이조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려다가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되었다. 1697년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699년 풀려나 이듬해 안동 금양에 정착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는 인현왕후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서인들의 질시로 여러번 복관되었다가 취소되고 시호도 내려졌다가 환수되었다. 1909년 최후로 관직과 시호가 회복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홍범연의(洪範衍義)》,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 《존강록(尊岡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 《영공록(永恭錄)》, 《갈암집(葛庵集)》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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