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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목판본 의령남씨 남효온(南孝溫) 추강집(秋江集)권4 1책(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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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목판본 의령남씨 남효온(南孝溫) 추강집(秋江集)권4 1책 맨앞한장 하단부 일부 떨어지고 맨뒤 작은 구멍난곳있음 크기:30*21.5센치 보34-2-3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 행우(杏雨) · 최락당(最樂堂)이다. 영의정 남재(南在)의 5세손이며, 생원 남전(南힜)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학자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거주하였다. 성종 9년(1478) 왕이 우토(雨土)의 재난으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자 상소를 올리며, 소릉(昭陵 :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릉(顯德王后陵))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소릉복위는 세조의 즉위사실과 그로 인하여 배출된 공신들의 존재 명분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당시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그를 국문하기를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위정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보게 되었다. 1480년 어머니의 명으로 마지 못하여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그 후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과거에 나가기를 권하였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소릉복위 주장은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에 용납될 수 없었고, 그는 도리어 다른 명목으로 박해당하였다. 그러므로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한탄하며 바른 말과 과격한 의론으로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됨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며, 신영희(辛永禧) · 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로 맺어 술과 시로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유랑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성종 23년(1492) 39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또한 그가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담백하였으며, 영욕을 초탈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스승인 김종직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이라 하며 높이고 아꼈다고 한다. 주계정(朱溪正) · 심원(深源) ·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통신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떨친 조신(曺伸)이 일본에서 돌아와 시를 보기를 청한 뒤 그와도 내왕하였다. 김종직의 문하가 된 것도 그의 소개로 연유하였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김시습(金時習)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중종 8년(1513) 소릉복위가 이뤄지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 다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長興)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양(咸陽)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의령(宜寧)의 향사(鄕祠)와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육신전(六臣傳)》 · 《추강집(秋江集)》 · 《추강냉화(秋江冷靴8》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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