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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판서,홍문관제학,한성부윤을 역임한 오취선(吳取善)간찰(18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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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판서,홍문관제학,한성부윤을 역임한 오취선(吳取善)간찰2장 피봉포함 크기:35*52센치 *오취선(吳取善) 1804(순조 4)∼?.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위(舜爲)이다. 군수(郡守)를 역임한 오경원(吳慶元)의 손자이자 오현상(吳顯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재순(成載淳)의 딸이고 한성출신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순조 27년(1827)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겸설서(兼說書) ·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 · 이조 참의(吏曹參議) ·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철종 2년(1851) 대사헌(大司憲)이 된 뒤 여러번 그 직을 맡았고, 1858년 형조 판서(刑曹判書) · 1861년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고종 즉위 후에도 중용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 ·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병인(丙寅) · 신미양요(辛未洋擾) 후 외직을 맡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말 재임 6개월간에 6만 8,000여 냥을 불법으로 남용하였다는 김병학(金炳學)의 탄핵을 받았으나, 조상의 음덕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데에 그쳤다. 그뒤 고종은 횡령한 16만 8,000여 석을 탕감하여 주고, 뒷처리는 경상도 자체에서 해결하도록 조처하였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비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사면되어, 곧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또한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추천으로 부정부패한 포도청(捕盜廳)을 대신하여 민간의 송사를 담당하였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오래 재직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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