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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4권2책,본집 1책 완질 정몽주(鄭夢周)(조선시대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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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목판본으로 간행된 정몽주(鄭夢周)선생의 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4권2책,본집 1책 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26.3*19센치 **圃隱 鄭夢周(1337·1392)의 詩文集. 본래 圃隱의 嗣子 鄭宗誠이 1409년(太宗 9)에 유고를 수습하여 權近(1352·1409)과 卞季良(1369·1430)의 교정을 받아 詩藁로 출간 한 것이다. 그 후 傳刻되어 新溪本·開城本·館本 등 판본 간에 詳略 舛錯이 생겨 柳成龍(1542·1607)이 宣祖의 명을 받고 校勘·考正하여 중간하였다. 또 亂을 겪고 난 후 灰燼된 것을 1607년(宣祖 40) 다시 重刊孤本과 舊本을 구득하여 補正을 가한 것을, 柳永詢과 黃汝一이 합력하여 간행하였다. 1659년(孝宗 10)에 다시 圃隱의 後孫 鄭維城 등이 중간하였다. 이상이 圃隱의 詩文·遺墨과 年譜·本傳·行狀에 諸家의 序跋과 讚詠詩文을 附錄한 4卷本 原集의 연혁이다. 1667년(顯宗 8) 圃隱의 11代孫 鄭纘輝가 圃隱의 遺詩文 수편을 구득하여 拾遺를 만들고, 御製·御筆·遺像·年譜·遺事·褒典 등을 수집하여 續錄 3권을 만들어 原集을 정리한 것과 함께 간행하였다. 本 奎章閣所藏 本은 高宗朝(1864·1906)에 後孫 鄭煥翼이 舊刊 諸本을 讐校하여 간행한 것이다. 鄭夢周의 初名은 夢蘭, 자는 達可, 호는 圃隱, 高麗 烏川人이다. 謚는 文忠. 1360년(高麗 恭愍王 9) 三場에 連魁하여 第一名으로 擢拔되었다. 1362년 藝文館 檢閱이 된 이래 諸官職을 역임하여 侍中·右文館大提學에까지 이르고, 佐命功臣의 賜號를 받았고, 益陽郡忠義伯에 封해졌다. 1368년 朱元璋이 皇帝를 칭하여 明을 세우고 元이 北鄙로 몰리게 될 때 철저한 親明派로, 蒙古風을 일소하고 明의 문물제도를 도입 실시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학술사상에 있어서도 불교사상과 그에 부수하는 미신을 배격하고 程·朱의 性理學을 숭상하였으며, 五部學堂과 鄕校를 설치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진력하여 東國理學의 조종이 되었다. 외교면에 있어서도 활약하여 明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데 힘썼다. 1375년 高麗에서는 王이 弑害되고 明使 蔡斌이 시해되는 등 親元派의 발악이 극도에 달해 明과의 관계가 험악하여졌다. 1376년(高麗 禑王 2) 成均大司成이 되어서는 明의 의혹을 풀기 위해 사신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崔源吉을 明에 보내 告喪請謚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 北元의 사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1,000여명의 연서를 얻어 반대하였다가 (卷3 雜著第七, 請勿迎元使疏 참조) 權臣이며 親元派였던 李仁任에게 몰려 彦陽으로 放逐되었다. 1381·1382년에 걸쳐 進貢使 또는 請謚使로 明京에 가려 하였으나 다 遼東에서 저지당했다. 1384년에 만난을 무릅쓰고 賀節使로 明京에 가서 明 太祖를 만나 그의 환영을 받았다. 1374년(高麗 恭愍王 23) 北面都指揮使의 從事官으로 和州에서의 女眞토벌에 출정하여 다음해 女眞의 三善·三介를 패퇴시켰다. 이 때 李成桂軍과 鐵嶺에서 합동작전을 하였던 것이다. 1377년 日本에 使行으로 가서, 그 主將을 설득하여 倭寇의 侵擾가 없어지는 듯하였으나 1380년 倭寇가 대거 침입, 智異山을 거점으로 노략을 자행하게 되자 다시 그는 元帥 李成桂의 從事官으로 全羅道에 출전하여 왜구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그의 長輩였던 李成桂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또 明의 문물제도와 학술사상을 도입하는 데에도 서로 협력하였었다. 그러나 李成桂의 세력이 팽배해져 易姓革命의 조짐이 현저하여 지자 그는 그 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부심하다가 결국은 그 세력에 몰려서 고려의 중신으로서의 절의를 꿋꿋이 지키며 의연히 善竹橋에서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卷頭에 宋時烈의 序, 盧守愼의 重刊序, 權採·朴信·河崙의 詩卷序, 卞季良의 詩藁序 및 目錄이 있다. 卷1·2 :詩(三月十九日過海宿登州公館郭通事金押馬船阻風未至因留待 등). 卷3 :雜著(松軒李侍仲畵像讚 등). 卷4 :年譜攷異(附 宅·墓·碑·畵像·書院·本傳·行狀·碣陰). 附錄(文 4, 詩賦 15, 龍飛御天歌, 書疏議, 祭祝告辭 7, 諸家記述)에 이어 鄭宗誠의 詩集跋, 柳溥의 詩集新溪開刊跋, 柳成龍의 圃隱先生集跋, 曺好益의 重刊跋이 있다. 이어서 續集으로 卷首에 諸大王御製詠贊及御筆, 圃隱先生遺像, 續集目錄. 續集 卷1 :丹心歌, 詩(謹和遁村六月十五日之作 등), 疏·啓·墓誌銘(請赦金貂毁佛罪疏 등). 祭儀, 相思曲, 大學義. 續 卷2 :年譜·遺事 등. 續 卷3 :陳請(疏 3, 延臣奏辭 7, 禮曹啓辭 2), 讚述(祭文·祝文·告辭 10, 古今贈詠 15), 鄭纘輝와 宋秉璿의 重刊跋의 순서로 되어 있다. 圃隱은 學術 詞章이 兼長하고 탁월한 經濟之才를 지닌 불세출의 雄傑이었다. 그는 國事에 盡瘁하고 詞章에는 전력하지 않았고 또 詩文 보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그의 시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본서에 수록된 2권여에 걸친 詩만으로도 그의 문학을 어느 정도는 窺知할 수 있다. 古·近體의 五·六·七言을 다 자유스럽게 구사하였다. 그의 詩에는 爲國盡忠하는 충정과 시폐를 匡救하자는 포부와 더불어 남아의 기개와 풍류가, 長者의 풍도를 잃지 않으며 호기차고 운치 있게 나타나 있다. 그의 詩는 대체로 豪逸秀發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圃隱詩에는, 우리 漢詩에 흔한 生硬한 티가 없고 發語가 通暢하다. 卷1 은 使行時의 吟詠으로, 그 대부분은 明에 갔을 때의 所作이고, 끝의 13수는 일본에 갔을 때에 지은 것이다. 이 부분은 문집 출간 전에 圃隱奉使藁로 單行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鄭道傳, <圃隱奉使藁序> 參照). 紀行詩에 그치지 않고 대개 感槪가 寄托되어 있다. <皇都詩>4수, 특히 그 제2수에는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기쁨과 국가의 난국을 타개한 감격이 진솔하게 발휘되어 있다. 제2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국내에서의 吟詠이다. 詠懷를 비롯하여 行役, 外使儐接, 友朋 同僚들과의 贈答 酬唱 등으로 <又次遁村韻其二>, <登全州望景臺> 등 絶唱이라고 할 만한 好品이 적지 않다. 卷3 에는 拾遺 5수가 載錄되어 있다. 그리고 續錄 卷1 에는 유명한<丹心歌>(漢譯) 및 <想思曲>과 詩 7수가 수록되어 있다. 卷3의 雜著 數篇과 續錄 卷1 의 疏·啓 등의 문장은 조리가 정연하고 논지가 克明하고 확고한 소신이 뒷받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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