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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정선생문집(樂靜先生文集)권지1~3 1책 조석윤(趙錫胤)(1670년(顯宗11年)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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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顯宗11年)목판본으로 간행된 조석윤(趙錫胤)선생의 시문잡저집인 낙정선생문집(樂靜先生文集)권지1~3 1책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26*18센치 보18-4-1 **조석윤(趙錫胤) 1606-1655 (선조39-효종6)字: 胤之‚ 號: 樂靜‚ 本貫: 白川‚ 父: 廷虎‚ 母: 靑松 沈氏 어려서 張維에게 古文詞를 배웠다. 1626년(인조 4) 과거에 급제했으나 罷榜되었고‚ 1628년 다시 급제했다. 이후 정언‚ 헌납‚ 예조·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5년 李珥‚ 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주장했고‚ 1636년 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에 嶺南을 巡檢하다가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營兵을 모아 싸웠다가 패하고 後事를 도모하던 중 講和가 성립되어 무산되었다. 이후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斥和內修를 주장하여 時弊를 개혁할 것을 적극 건의하여 위로 內需司에서 여러 궁가‚ 아문‚ 아래로 수령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촉구하고‚ 防納의 변통과 魚鹽 등 山澤의 이익을 백성과 공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들은 말년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1649년(효종 원년) 대제학이 되어 仁祖實錄의 編纂을 맡았고 이후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의 등을 지냈다. 효종을 간하다가 1650년‚ 1651년 임천‚ 영암 등지로 귀양가기도 했으나 곧 풀려났다. 1653년 徐元履와 다투다가 종성부사로 좌천되었고 풀려나와 동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되어 죽었다. 성품이 차분하고 단정하였지만 상소하는 내용은 간절했고 금기를 피하지 않았으므로 선배들이 제일로 여겼다고 한다. **趙錫胤(1605~1654)의 詩文集. 門人들이 그의 死後에 遺稿를 모아서 1670년(顯宗 11)에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자는 胤之, 호는 樂靜, 본관은 白川이다. 金尙憲의 門人으 로 1626년(仁祖 4) 別試文科에 丙科로 급제하였으나 罷榜되고, 1628년에 다시 別試文 科에 甲科로 급제하여 侍講院司書·修撰·晋州牧使 등을 지냈다. 1650년(孝宗 1)에는 兩館大提學으로 ≪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吏曹參判·鍾城府使 등을 지냈다. 그 는 絶異한 資質로 일찌기 實學에 뜻을 두고 冊文에 沈감하여 德行의 아름다움에 돈독 하였다. 左贊成에 추증되있고 시호는 文孝. 책 머리에 宋時烈의 序가 있고, 卷{1~5} 는 詩로 卷{1}:五言絶句 15수(霧中渡江, 獨立 등), 七言絶句 80여수(雨中渡鷺梁, 村居 暮春 등). 卷{2}:五言律詩 180여수(大興洞, 富平西軒, 淸心樓次板上韻 등). 卷{3~4}: 七言律詩 220여수(登樂民樓, 過滿月臺, 踰馬峙, 江舍雪夜, 望洋亭, 鏡浦臺, 洛山寺 등 ). 卷{5}:五言排律 6수(次杜子美謁先主廟韻, 仁烈王后挽詞 등). 五言古詩 40여수(滿月 臺, 課農, 雨後登西樓小酌 등). 七言古詩 7수(秋霖歎幽谷途中作, 賈客行 등). 그의 詩 는 모두 수준급이어서 뜻을 폄에 繩削이 심하지 않고 스스로 規度에 들어맞으니 대개 性情이 표현된 것이라고 宋時烈은 序文에서 評하고 있다. 卷{6}:冊敎文 9편(仁烈王后 追上徽號玉冊文, 王世子冊封頒敎文 등), 敎書 3편(平安道觀察使敎書, 三道統制使敎書 등), 不允批答(右議政初度呈辭不允批答 등), 箋文 6편(冬至賀箋, 王世子冊禮後世子中 殿謝箋 등), 上梁文 3편(沙溪先生書院講堂上梁文 등). 卷{7}:疏 4편(請責却虜使奮發修 攘疏, 應旨陳時務疏, 請與斥和諸臣同被罪罰疏 등). 卷{8}:疏 11편(請勿遣金尙憲等入瀋 疏, 陳民弊疏, 乞歸覲兼陳時事疏 등). 卷{9}:疏 9편(因旱災陳時事疏, 請兩賢從祀疏 등 ). 卷{10}:疏 18편(辭副提學兼陳時事疏, 辭大提學疏 등). 卷{11}:疏 19편(乞伏伸救兪 棨之罪疏, 辭撰進玉冊文疏, 應旨進言疏 등). 卷{12}:疏 31편(辭文衡疏, 不赴牌召待罪 闕外疏 등). 卷{13}:箚 4편(玉堂陳辨兩賢被誣箚, 玉堂應旨進言箚, 玉堂處置兩司箚, 諫 院應旨進言箚). 卷{14}:啓 24편(請永革內需司奴婢陳告之규啓, 政院請遇災修省啓, 請痛 革貢物防納之弊啓, 請査罷諸宮家各衙門屯田啓 등). 이 중 <請責却虜使奮發修攘?疏> 는 1636년 丙子胡亂 때 올린 것으로 金尙憲의 斥和論에 동조하여 和親을 반대하는 立 場을 밝힌 ?疏이다. <應旨進時務疏>는 25장에 달하는 長文으로 당시 사회의 제반 문 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는 丙子胡亂에서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을 반 대하여 그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權門勢家의 田莊廣占, 賦役의 不均等 현상을 비판 하고 있다. 稅制에 대하여 그는 여러 宮家에 대한 免稅가 비록 祖宗朝의 親한 이를 親 하게 하는 은혜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금에는 행함이 불가하니 특히 優恤의 법을 베풀 어서 敦睦한 뜻을 보여줌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官의 횡포에 대하여 內司 ·宮家·權門·諸司 등에서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벡성은 한 굽이의 물, 한 區의 산 도 차지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일찌기 한번도 백성을 편하게 하고 아랫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정치를 행하지 않고, 한갓 煩擾한 일체의 法을 만들어 이미 號牌로 그 원망을 샀으며 다시 量田으로 그 원망을 더하였고, 守令의 권위로 난폭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재촉하는 자를 일컬어 마음을 다하여 奉公한다 하고 자상하게 백성을 撫愛하는 자는 道를 어겨 명예를 구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 습관처럼 오히려 이미 굳어 져 있으니 그 害가 날로 심하여 우리나라 수천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국방에 대하여 그는 關西地方의 백성들로 하여금 胡兵을 방어하게 하면 자기들의 집과 부모·처자를 위하는 것인 만큼 그 용기와 날카로움이 남쪽지방 병사들에 비해 100배 는 되리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三鎭(義州·黃州·平壤)을 굳게 함이 요체가 된다고 보 고 있다.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는 길은 병사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人心을 얻 음에 있다고 보며, 조정에서는 한갓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재물을 모을 줄만 알았지 節用하여 재물을 유족히 함을 알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지배층의 사치풍조를 일소할 것 을 주장한다. 나라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임금는 신하들이 올리는 上疏에서 취할 것은 취하여 행하게 해야 하며, 武를 떨쳐 일으키고, 政刑을 닦아 밝히고, 장수들을 申飭하 여 三鎭의 守를 규畵하고, 內地에서 布를 거두어 關西地方의 백성을 모집하여 모두 敎 鍊하여 兵士를 삼고 府庫의 財物을 열어 호賞하는 데 사용하면 軍政이 修擧하고 士氣 가 丕振하여 변방이 튼튼하게 되고 국가가 평안해 지리라고 보고 있다. 또한 임금이 講學에 충실치 않고 그 행위가 불명료한 데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밖의 疏 나 啓·箚들도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다룬 것이 많다. 附錄으로 洪위가 撰한 家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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