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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창박선생문인록(芸窓朴先生門人錄)1책완질(소화5년(1929년)목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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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5년(1929년)목활자본으로 간행된 운창(芸窓)박성양(朴性陽)의 운창박선생문인록(芸窓朴先生門人錄)1책완질 상태아주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1.7*19.8센치 **밀양(密陽)박래억(朴來億)의 서문,범례,주로 합천,보은,영동,금산,청산,거창,김천,홍주,고산, 등지의 문인480명의 생년시와 거주지,호,자 등이 기록되어있으며,운창선생행장등이 기록되어 있음 **운창은 서울출신으로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 (闢邪銘)'을 지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지평·호조참의·동부승지·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인산은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으며,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인물은 아니지만 노론계 인물로 죽성 집안과는 학연이 오래전부터 맺어져 있었으며, 이들의 학문 사상이 죽성에게 많은 영향을 비친 것으로 보인다. 운창과 인산은 죽성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더욱 경사백가에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틈틈이 과거문도 익혀 과거장에 나아갔으나 관리들의 횡포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을 쏟게 된다. 보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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