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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4권2책완질(1783년(上之七年)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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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上之七年)목판본으로 간행된 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4권2책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1*20센치 **金垓(1555∼1593)의 詩文集으로 1708년(肅宗 34) 曾孫 錫胤이 수습한 것을 1783년( 正祖 7)에 간행한 것이다. 金垓의 字는 達遠, 號는 近始齋, 光州人이다. 어려서는 退 溪門에서 배운 바 있는 叔父 後彫公에게 受學했으며 자라면서 讀書窮理, 刻려不懈했다 . 1588년(宣祖 21)에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歸退하여 鶴峯, 西厓와 같이 退溪文集을 修整했다. 1589년에 등제하여 藝文檢閱을 지냈으나 罷任되있다. 그후 杜門田里하고, 不言時事하고 文學과 德行에만 精進하다가 임진란을 당하자, 感慨涕泣하고 同志를 규 합하여 義兵大將이 되고 安東義將 李庭栢과 裴龍吉을 左右副로 하여 盡力忠誠했다. 「 除夕」의 詩는 당시 그의 愛君憂國의 忠誠과 慷慨悲壯한 心懷를 알려준다. 1595년에 承議郞弘文館修饌에 追贈되었다. 金垓은 비록 年若하게 서거했으나, 智仁勇이 兼美하 고 또한 박식하였다. 저서로 ≪求益錄≫≪行軍須知≫, ≪西行日記≫, ≪鄕兵日記≫ 등 이 그 題名만 보인다. 앞에 趙德?의 序가 있다. 辭(3), 詩(117), 書(42), 雜著(3), 祭 文(2), 表(1), 箋(1), 啓(1), 遺事(2), 墓誌(2)와 附錄으로 公의 行狀, 墓誌銘, 家狀, 龍蛇記事 등이 있다. 끝에 丁範祖·李보의 跋이 있다. 卷{1}:모두가 「和···」라고 된 辭는 靜穩한 그의 性品을 잘 보였다. 「和秋風辭」에서는 호방한 武氣가 文氣로 대 체되고 있다. 「又和泛汾辭以寓意」도 같은 傾向의 辭다. 詩는 有德君子의 詩라 하겠 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그의 詩는 學問精神과 道義之交를 읊은 것이 많다. 五言古詩 「陶山言志示同栖」는 自得樂道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의 詩는 風趣가 淸逸하고, 풍부한 학식이 활용되었으며, 또한 聲律의 묘가 있어 詩人으로서도 높이 評 價받을 수 있다. 「枕流亭演龍潭韻」은 걸작이다. 「失題」「齋居夜坐偶吟」에서는 특 히 생활상이 나타난다. 五言에서 蕭酒한 솜씨를 보이고 七言에서는 더욱 그의 본령을 發揮했다. 「次月川文韻」, 「失題」, 「日體堂謹呈月川文」 등은 그의 孤高한 氣槪, 思想, 性情을 流暢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고독과 허무를 詩에서 많이 읊었다. 卷{2}:書로 「與南義仲致利論禮書」와 「與南義仲論喪禮」에서 古禮古制를 독실하게 行禮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喪禮, 奉祠, 葬前後禮 等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밝히고 있 다. 卷{3}:書로 주로 季節問候의 書다. 그러나 간간이 論學論禮한 것이 있다. 雜說로 「理氣說」은 그의 學問을 理解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특히 四端七情을 論하고 있다. 「深衣辨」에서 深衣制에 대해 諸子의 說이 旁引牽合하여 난잡해졌음을 지적하고 朱子 의 明白簡當한 說에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擬大學生等請撤去諸道寺刹箋」에서는 金 垓의 斥佛崇儒의 태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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