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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1-2
**조선 중기의 학자 · 정치가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문보(文父) ·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 태령노인(台嶺老人) · 석호노인(石戶路人),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증조부는 찬성을 지낸 허자(許磁), 조부는 별제 허강(許橿), 부친은 허교(許喬)이다. 모친은 나주 임씨이며, 1595년 서울 창선방에서 태어났다. 손바닥에 '(文)'자 무늬가 있어 자(字)를 문보(文父)라고 했으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1)라 자칭했다. 부친과 외조부 임제(林悌)의 영향으로 도가(道家)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허목은 지방관을 지낸 부친을 따라 양성 · 고령 등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19세 되던 1613년에 완선군(完善君) 이의전의 딸이자 오리(梧里) 이원익의 손녀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였다. 당시 이원익은 허목을 매우 총애하여 '후일에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며 큰 기대를 하였다고 한다.1615년 정언옹(鄭彦顒)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친이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문위의 소개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 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 · 서 · 역 · 춘추 · 예의 오경(五經)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닌 당시 사회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연구의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1626년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 이후 정릉참봉 · 내시교관 · 조지서별좌 · 공조좌랑 · 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1674년 효종 비의 상(喪)에 조 대비가 입을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그는 80세의 나이에 대사헌에 특배되었고, 이후 이조참판 · 우참찬 겸 성균관 좨주 · 좌참찬 ·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는 불과 반년 만에 다섯 번이나 자리를 옮겨서 삼공(三公)에 이른 파격적인 인사였으며, 그가 숙종의 지극한 우대를 입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허목도 관작을 삭탈당하였고 이후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湄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692년 숙종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고 1693년에도 숙종은 나주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나주에 허목의 서원을 세우도록 특명(特命)을 내리고 아울러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는 액호를 내려 주었다. 그 후 1708년에 창원에 있는 스승 정구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함께 배향되었다.글씨와 그림 모두 능했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었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행초(行草)의 운필(運筆)로 전서를 쓰는 독자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해서와 행서에도 그 전법(篆法)을 그대로 응용하여 글씨에서 고상하고 고졸(古拙)한 풍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허목의 전서는 소전(小篆)의 기본인 설문해자(說文解字)나 중국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전법에 바로 입문하지 못하고, 중국 남북조시대 글자가 많이 섞여 있는 자본(字本)이나 위작인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등을 그대로 답습하여 본도에서 벗어났다는 평을 얻었다. 허목의 글씨는 동시대와 후대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수전(眉叟篆)'으로 통칭될 만큼 독특한 창의력과 개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예술성을 발휘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대표작은 강원도 삼척에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銘)>를 비롯하여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 <함취당(含翠堂)>, <애민우국(愛民憂國)>, 행서로 <백운계기(白雲溪記)>가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척주동해비>(1661)는 허목이 예송논쟁에서 패하고 좌천되어 삼척 부사로 부임하였을 때 자연재해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을 담아 동해 바다를 예찬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이를 자신의 독특한 전서체로 써서 새긴 비석으로, 허목의 기굴고졸(奇崛古拙)한 전서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가지치고 구불구불한 것이 마치 천년 묵은 마른 등덩쿨과 같았다"거나 "신기하여 마치 귀신의 숲과 귀신의 굴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한 홍양호(洪良浩)의 묘사나 "마치 이그러진 솥과 깨진 그릇 같으니 억지로 말하면 은주(殷周)의 옛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는 『항해집(沆瀣集)』 중의 표현과 같이 허목의 전서는 떨듯 구불구불한 필획으로 기이한 효과를 내었다. 허목의 글씨는 당색과 학풍을 달리한 서인(西人)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당시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전주(篆籒)에도 능했던 판서 이정영(李正英)은 허목의 전체(篆體)를 금지케 하자고까지 하였다. 이 비는 파손되었다가 1709년 다시 건립되어 오늘날 전한다.<함취당(含翠堂)>과 <애민우국(愛民憂國)>은 대자(大字) 전서의 대표작이며, <애민우국>의 경우 특히 획법이 경건(勁健)하고 힘차다는 평을 듣는다.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 중의 「금석운부(金石韻府)」와 「고문운부」는 각 글자의 정서자(正書字)를 손수 쓰고 다음에 각 체(體)의 전(篆)을 기입한 전서자전(篆書字典)으로서 금석과 각종 고문(古文)을 널리 참고하여 내용이 풍부하여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필획의 묘가 잘 살아있는 묵서를 보면 획의 끝은 가늘게 빼면서 살짝 구부려 올챙이의 꼬리를 연상시키거나 꾹 눌러 뭉뚝하게 하여 올챙이 머리처럼 표현하여 "창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 칡 붓으로 과두를 쓰고 있다[不知窓外事 墨葛寫蝌蚪]."라고 한 자신의 시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올챙이를 닮은 과두체(蝌蚪體)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백운계기(白雲溪記)>는 경기도 영평의 명승을 둘러보고 쓴 기문으로 허목의 대표적인 행서 작품이다. 전서의 맛을 응용하여 창안해 낸 허목의 독특한 행서체로서 차원 높은 경지의 고졸한 맛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림도 잘 그렸으며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기언(記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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