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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경발(景發), 호는 삼익재(三益齋). 이흥문(李興門)의 후손으로서 아버지는 암서(巖棲) 이침(李忱)이고, 어머니는 훈련봉사(訓鍊奉事) 이수(李樹)의 딸 광주 이씨(光州李氏)이다.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1567~1634]은 동생이고, 영남의 삼용(三容)으로 알려졌던 백용(伯容) 이홍기(李弘器)·중용(仲容) 이홍량(李弘量)·계용(季容) 이홍우(李弘宇)는 외숙이다.
이천배(李天培)[1558~1604]는 가학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공부에 열중하였다. 2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해 상을 마치고, 어린 동생 이천봉을 양육하며 학업으로 이끌었다. 3년상을 마친 후 동생과 함께 이모부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공부에 두각을 드러내었으나 위기지학(爲己之學)[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3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모에게 받은 신체를 보존하는 효를 실천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하고 산속으로 피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마을로 돌아와 당호를 삼익재(三益齋)라 하고, 칠곡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대구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김천의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와 도의로 교유하였다. 후학 양성에 있어서는 수신제가의 도리를 강조하고 실천에 매진함을 중시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를 입은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중창(重創)에도 힘을 기울여 묘우(廟宇)를 고쳐 세우고 위패를 새로 봉안했으며, 서원의 운영에 필요한 일을 스승 정구의 뜻에 따라 정하였다. 47세 때인 1604년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났고, 정구는 제문을 지어 제자의 학덕과 행실을 칭찬하고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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