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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天啓二年(1622)...李廷龜
跋: 天啓三年(1623)...金止男
刊記: 壬寅(1662)天啓三年后壬寅)玉山書院重刊
**조선 전기 밀양부사를 역임한 문신.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와 자계옹(紫溪翁)이다. 본관은 여강(驪江)[지금의 여주]이며, 1491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참군(參軍)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다.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이며,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1433~1484]의 딸이다. 이언적은 1529년 11월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었고, 1553년 유배지 강계(江界)에서 사망하였다.
이언적은 15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상북도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다시 불려 나와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와 응교(應敎), 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되었으나,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많은 저술을 남기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529년 8월 경상도 암행어사에 차임되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여 1529년 11월 밀양부사에 제수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하는 동안, 백성을 대하고 하리(下吏)를 거느릴 때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조리와 법도에 맞게 하여, 관리들은 조심하고 백성들은 그 덕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밀양부사로 1년 남짓 재임하다가 1530년 사간원 사간으로 소환되어 상경하였다. 밀양 영남루에서 음영(吟詠)하였다고 하며, 낙동강(洛東江)의 하류인 해양강(海陽江)의 경치가 빼어나 제영(題詠)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언적은 1553년 유배지 강계에서 사망하였다.
이언적은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대하여 주희(朱熹)[1130~1200]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조선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언적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1501~1570]에게로 계승되었다. 유배지에서는 『구인록(求仁錄)』[1550],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이언적은 1569년 종묘(宗廟)의 명종(明宗)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상북도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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