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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은 1848년 2월 29일 한성부 남부 대평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서 부사(府使)를 지낸 아버지 한승렬(韓承烈, 1817 ~ 1860. 9. 26)과 어머니 해주 오씨(1814 ~ 1904. 4. 4)[3]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한원식(韓元植, 1790 ~ 1866. 8. 27)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4]
1876년(고종 13) 증광 무과에 급제하여 28세에 진주병사에 임명되고, 이후 1883년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우병사를 지냈다. 1885년에는 금군별장을 거쳐 우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거쳐 1887년에 형조판서, 한성판윤, 친군장위사(親軍壯衛使),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을 차례로 역임하고, 1894년 총어사(摠禦使),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시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898년에는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써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역임하였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의정부 찬정, 1905년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5]이 되었다. 그 해 을사조약 체결 당일 어전회의 직후 대신 8인과 하야시 일본 공사,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모인 회의장에서 조약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이후 회의 도중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엄귀비의 거처에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졸도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참정대신의 자리에서 파면된다.[6][7]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작위를 거절 혹은 박탈당한 인구는 그 많은 작위 수혜자 중에서 불과 8명이다.제품소재 | 상품페이지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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