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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西庵) 스님은 해방 이후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8대 조계종 종정 등을 역임한 선승이었다.(1917년~2003년)

속성은 송(), 이름은 홍근(鴻根).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5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스님의 어머니는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거북이 나타나는태몽을 꾸고 살고 있던 풍기 땅에서 친정인 안동 구송리로 옮겨 거기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독립항쟁으로 참담한 유랑생활 도중에서도 마을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우고, 그 영민함으로 천재소년이라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타고난 총명에 깊은 사색(思索)을 좋아해 스님은 인생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즐겼으며 어린 나이였지만 필적할 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보라는 예천 서악사(西嶽寺)의 화산(華山) 스님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했다.

제 인연은 스님에게 있습니다.”는 말과 함께 1932(16)에 경북 예천 서악사(西嶽寺)에 출가했다. 화산 스님의 활구(活句)에 꼼짝 없이 묶인 것이다.

그리고 3년간 머슴과 같은 고된 행자 생활을 마쳤다. 고된 생활 가운데에서도 당시 대강백이셨던 화산 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緇門警訓)>, 의식 등을 배우며 출가 수행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935(19)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화산(華山) 스님을 은사로 낙순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수계했다.

1937년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하며,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계하고, 법호를 서암(西庵)으로 받았다. 이후로도 금오 스님과의 사이는 인연이 각별했다.

1938(22)에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준비해 종비장학생 자격으로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다. 일본으로 가서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했으나, 1940(24) 당시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3학년에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41(25)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예천 대창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1942(26)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해, ‘이제부터 생사의 근본 도리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김룡사 선원에 안거 정진하고, 1943(27) 북쪽으로 만행 중 1년 동안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

1944(28) 여름에는 금강산의 마하연(摩訶衍)과 신계사(神溪寺)에서 정진하면서 어느덧 몸에 있던 병마는 흔적 없이 사라져 기적과 같이 건강을 회복했다. 이해 가을 묘향산과 백두산을 거쳐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바위굴에서 성철(性徹) 스님을 만나 함께 용맹정진 동안거를 하고, 1945(29) 역시 대승사에서 청담(靑潭) 스님, 성철 스님과 하안거를 함께 했다.

1945(29) 광복이 되자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예천포교당에 머물며 징병과 징용을 당해 죽음의 땅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보살행을 실천함과 동시에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계룡산 나한굴(羅漢屈)에서 용맹정진 단식하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하고, 목숨을 건 정진으로 머리는 풀어 헤쳐지고 뼈만 앙상해졌으나, 의식은 오히려 맑아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날들을 보내다가, 한순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본무생사(本無生死)를 깨달으니, 30세 때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만공(滿空) 스님 회상인 덕숭산 정혜사와 한암(漢岩) 스님의 회상인 오대산 상원사, 그리고 가야산 해인사, 도봉산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했다.

1948(32)부터 1950년까지 지리산 칠불암,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 등지에서 금오(金烏) 스님을 모시고 정진을 했다.

1952(36)부터 문경/상주 청화산(靑華山) 원적사(圓寂寺)에 주로 주석하는데, 그를 흠모해 모여든 많은 수좌들과 함께 수행했다. 원적사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도 하면, 이는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천축사 무문관 등지에서 정진했기 때문이었다.

54세 되던 1970년에 희양산 봉암사 조실(祖室)로 추대됐으나 사양하고 선덕(禪德)소임을 자청했으나 당시 봉암사 대중들이 선방 벽에 붙어있는 용상방(龍象榜)에 스님의 법호를 조실 자리에 붙이면 스님이 떼어내고, 다시 대중들이 붙이면 스님이 다시 떼어내곤 했다. 그러면서 원적사를 오고 갔다.

1975(59)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어려운 종단 사태를 수습하려고 총무원장을 맡은 것이지 승직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인 좋은 사례이다. 오늘날 총무원장 서로 하려고 말썽 많은 사태의 좋은 본보기 타산지석이다.

1978(62) 이후부터는 봉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승풍(僧風)을 바로 잡고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했다. 수행환경을 위해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일반인에게 통제해, 오늘날 모든 수좌들의 고향으로서의 봉암사를 있게끔 만들었다.

1991(75)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해 종단의 중심을 잡은 후에 미련 없이 산으로 돌아왔다.

1993(77)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으나 총무원장 자리다툼을 하는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이듬해에 종정 재임 140일 만에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고, 종단마저 떠났다. 그리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無爲自適)했다.

2001(85)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해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閑居)하다가, 87세 때인 2003329일 봉암사 염화실에서 우리시대에 올곧은 스승의 모습으로 홀연히 몸을 바꾸었다. 세수 87, 법랍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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