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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장8-1-1
**引: 丙寅(1926)...河性在 敬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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