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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임란의병장 태암 이주 태암선생문집(苔巖先生文集)4권2책완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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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좋음 보28-3-1 ****태암(苔巖)의 성명은 李주로서 자는 경임(景任)이고 당호는 육휴당(六休堂)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으로서, 태종 때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오천(烏川, 李文和 1358-1414)의 8대 손(孫)이다. 명종11(1556)년 문행(文行)으로 이름 있던 소재(疎齋, 李文星)의 아들로 대구 파긍리(巴岑里)에서 태어났다.29세의 태암은 모친의 지시에 따라 관료로 될 관문인 여러 가지 시험을 치른다. 향시에 합격한 뒤,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 및 동당시(東堂試)에 모두 장원을 하여 ‘삼장원(三壯元)’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이듬해 회시(會圍)에 참여하여, 시강(試講)에서 경문들을 두루 거침없이 암송하던 중 ꡔ대학ꡕ에서 문뜩 막히는 데가 생겨 머뭇거리다가 스스로 퇴장하였다.8) 그 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다시는 과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환(仕宦)의 길을 결연히 단념한 그였다. 그의 나이 37세 때는 마침 임진왜란이 닥친 해(1592)이다. 그 해에도 그는 주희의 책(朱書)을 강의하였는데, 4월에 왜구가 침입하였던 것이다. 그는 모친을 모시고 팔공산으로 피난하였다. 피난 중인 그 해에 그는 둘째 자제를 잃고, 삼년 뒤(40세, 乙未)에는 그 난 중에 모친의 상까지 당한다. 물론 모친상으로 해서 2년간은 그의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상중 외의 기간에는 군량미 조달, 의군 모병․관리, 의병장(義兵將)으로서 의군의 지휘 와 전투 등으로 활약하였다.10) 체찰사 한음(漢陰, 李德馨 1561-1613)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둔전(屯田)의 임무를 받기도 하였다. 왜군이 재란(丁酉)을 일으켰다가 소득 없이 철수한 해(1598, 43세)에,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愚伏(愚伏, 鄭經世 1563-1633)을 찾아가, ‘학교의 재건’보다 더한 급선무가 없음을 역설한다. 우복의 동의를 얻고서 태암은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학당(學堂)’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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