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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표실학자4인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4권1책완질 요약정보 및 구매

조선대표실학자4인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4권1책완질(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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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표실학자4인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4권1책완질(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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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표실학자4인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4권1책완질 상태좋음 크기:20.5*17.8센치 보17상2 **권1 이덕무(李德懋)1741~1793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무관(懋官)이다. 그리고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다. 정종(定宗)의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권2 유득공(柳得恭)1749~1807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4검서(檢書)의 한 사람으로서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도 4가(家)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혜풍(惠風) ·혜보(惠甫)이다. 그리고 호는 영재(齋) ·영암(菴)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 ·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1779년(정조 3)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 ·양근군수(楊根郡守)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사도(司)주부 ·가평군수(加平郡守)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 ·평양 ·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첫째, 시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둘째,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1777)이 있으니, 나중에 《병세집(竝世集)》(1796)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가 《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 ·몽골 ·회회(回回) ·안남(安南:베트남) ·남장(南掌:라오스) ·면전(緬甸:미얀마) ·타이완 ·일본 ·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 ·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 ·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권3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이다. 그리고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승지 평(坪)의 서자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거처를 자주 옮겨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무렵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 救弊策〉을 올리게 했을 때, 전설서(典設署) 별제(別提)의 직에 있으면서 〈병오소회 丙午所懷〉를 제출했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는 상반된 것이었으므로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심한 당쟁에 휘말려 비판을 받고 급기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에 걸려 규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외국학자와의 교류를 제한받았으며 서적반입도 금지당했다. 1793년에는 승정원으로부터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제출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조의 후원 아래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 등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2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도중 원자(元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청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정조의 명으로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798년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1794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영평현령으로 옮겼다. 1798년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경(親耕)한 지 6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 應旨農政疏〉를 올렸다. 〈소진본북학의 疏進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다. 1801년(순조 1)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4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한편, 그는 당시의 공리공담을 일삼던 주자학적 사상계와 풍수도참설에 비판적이었다. 이에 기초해 존명(尊明) 사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청의 문물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며, 자기의 사회적 처지와 관련해 봉건적 신분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 틀에서 국부(國富)를 창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공업진흥론과 농업진흥론을 제기했다. 먼저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서 선진적인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상업진흥론을 적극 주장했다. 이는 당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천시하고 위험시하던 사대부들과는 반대되는 견해였다. 더욱이 상공업 육성에 장애가 되는 양반들을 도태시키기 위해 봉건적인 문물제도와 과거제도를 타파할 것도 주장했다.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① 교통기관을 발달시킬 것(用車論), ② 악화주조(惡貨鑄造)를 금지하고 화폐의 질을 높일 것, ③ 은의 해외유출과 중국상품의 유입을 철저히 금지할 것, ④ 밀무역(密貿易)을 양성화시킬 것, ⑤ 은을 축적할 것, ⑥ 국내시장을 확보할 것 등을 제시했다. 한편 국가의 부력이나 전경제기구 내에서 농업경제의 위치를 규정하고 경제기구 전반의 원활한 운영에 농업경제의 안정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농업경영의 합리적인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면 국가재정이나 경제질서 전반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농업진흥론은 농업문제 해결을 다른 산업분야와 연결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업이나 수공업도 아울러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의 유통으로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고 수공업의 발달로 낙후된 농기구를 개량한다면 농업의 합리적 경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농민경제와 국가재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물자유통과 물가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 수레를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의 반영이었다. 이와 함께 유생(儒生)도 노동을 하도록 하고 유통경제 부문인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일하지 않는 노동력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방안은 토지소유관계의 측면에서보다는, 당시 사회·경제 실태 위에서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함으로써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는 농지의 광점(廣占)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경영의 개선과 합리화·집약화를 통해 수익을 늘리는 것, 즉 소규모의 농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농업경영의 최대목표로 삼았다. 아울러 농업의 상업화도 구상하는 동시에 농업경영과 유통경제의 관련을 매우 강조했다. 또한 경영합리화의 기초작업으로서 농법개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합리적인 경종(耕種)을 위해 전무(田畝) 제도를 개선하고, 시비(施肥)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취분법(取糞法)을 개량하며,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농구를 개량하는 등이 그것이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보급시키고자 모범농장이라 할 수 있는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1776년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에까지 떨쳤으며, 청대 〈사고전서〉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聯形式)을 도입했다. 글씨는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화·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물고기 등의 그림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대련글씨〉·〈시고 詩稿〉·〈목우도 牧牛圖〉·〈의암관수도 倚巖觀水圖〉·〈어락도 魚樂圖〉·〈야치도 野稚圖〉 등이 전한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권4 이서구(李書九)1754∼1825(영조 30∼순조 25) 조선 후기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강산(薑山). 본관은 전주(全州). 1769년(영조 45)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문장을 배우고, 1774년 정시(庭試)에서 뽑혀 섭기주(攝記注)에 임명되었다. 그 뒤 시강원사서·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글씨에 능하였다. 중국을 다녀온 적은 없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 문사들과 교제하며 학문과 문학을 익히고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현실문제와 조선의 역사 및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그의 시는 온유하고 사색적(思索的)이며,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4가시인 혹은 실학4대가(實學四大家)라 불린다. 문집으로는 《척재집》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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