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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목활자본간행 한말대학자 이도추(李道樞) 월연집(月淵集)9권5책완질(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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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목활자본간행 한말대학자 이도추(李道樞) 월연집(月淵集)9권5책완질 상태좋으며 낙장없음 보12-3-2 **월연이 살았던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배출돼 과거에 급제를 하는 등 문풍(文風)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이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성씨는 진양하씨 밀양박씨 성주이씨들인데, 성주이씨는 태조 이성계 사위인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의 후손들이다. 경무공 손자인 사직공(司直公) 숙순(叔淳)이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단성에 처음 터를 잡았다. 단성에 터를 잡은 성주 이씨 집안에서는 한말까지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회봉이 문학이 뛰어났다고 평가를 한 월연 이도추는 1848년 정월 11일 괴헌(槐軒) 성범(聖範)의 아들로 남사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모친은 진양 강씨 기영(基榮)의 따님이다.월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여느 아이들처럼 장난을 치거나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밤에 글을 읽을때 가난하여 기름을 구할 수가 없자 산 열매를 따서 기름을 만들어 경서와 제자백가 등을 부지런히 읽어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었다.1866년 김해부사 성재 허전이 덕천서원을 참배하러 왔다가, 남사의 경매헌(景梅軒)에 들렀다. 이때 마을의 선비들이 성재를 만나러 모여들었는데, 월연도 형인 남천 이도묵과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성재는 행동거지가 남다른 10대후반의 월연을 유심히 살펴보고, 학업에 대해 물으면서 격려와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23세 때는 모친 진양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모친상을 마치고, 바로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성재 허전을 만나고 이어 개성에 들러 선죽교에서 포은의 충절을 기리고, 평양에 가서는 기자묘를 참배했다.1877년에는 형인 남천과 효효재 문진영, 후산 허유, 물천 김진호, 면우 곽종석 등과 두류산을 유람하고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았다. 이해 8월에 한주학파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진상이 지리산 유람을 왔다가 하산후 이틀동안 남사에 머물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강좌(講座)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 월연도 참석해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1883년 여름 곽종석 박규호 하용제 등과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고 '동유기행(東遊紀行)'이라는 장편의 글을 남겼다.이듬해에 서울로 올라가 성재 선생을 뵙고 안부를 묻고 친히 수십일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월연이 성재에게 작별을 고하자 성재는 자신이 지은 '법복편(法服篇) '을 보여 주면서 "내가 이것을 저술하는데 많은 힘을 들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자료를 참고하기 보다 스스로 연구해 옛날 제도를 익혔으니, 그대도 여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면서 심의(深衣) 한 벌을 직접 제작해 주었다. 이때 성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월연에게 예법에 깊이 연구해 보라는 당부를 한 것이다. 188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정성을 다해 상을 치렀다. 1889년에 물천 김진호가 진주 수곡 낙수암에서 강좌를 열어 근사록 태극 음양설에 대해 강의한다는 것을 듣고 참석을 했다. 1892년에는 집안 일로 대구에 갔다가 재상(宰相)인 李헌영을 만났다. 이때 이헌영은 임금의 명으로 대구 감영에 머물고 있었다. 위농(渭農) 하재구(河在九)가 이헌영을 보좌하고 있었는데, 위농은 당시 월연이 지은 '雨中述懷' 라는 시를 보고 이를 이헌영에게 보였다. 이때 이공이 칭찬하면서 "근세에 보기드문 뛰어난 시이다." 라고 하면서 예로써 정중히 대우했는데, 이때 아전들이 이 광경을 보고 대구감영에 뛰어난 선비들이 모였다라고 모두 칭찬을 했다고 한다. 1893년에 대원사에서 남명집 교정의 일에 참여했다. 남명집을 다시 간행하기 위해 모였는데, 이때 월연은 강좌지역으로 가서 용산(龍山) 이만인(李晩寅)을 배알하고 발문을 부탁했다. 용산을 만나고 곧 도산서원을 방문해 퇴계선생 사당을 배알하고 강좌지역의 선비인 동정(東亭) 이정호(李正鎬), 계약(繼若) 권유연(權有淵),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을 만나 교분을 나누었다.‘1895년에는 선조 경무공의 일로 광주를 방문해 필암서원과 노사 기정진의 고택을 보고 노사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과 일신 정의림 등 노사의 문인들을 만나 수일동안 교분을 나누었다. 당시 월연이 학맥을 초월해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과 두루 교유한 것을 볼 때, 학문적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조정에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람이 금수가 되었구나"라고 탄식을 하였으며, 이로부터 출입을 삼가고 마을에서 제자들을 기르는 일에 전념을 했다. 경상관찰사 조시영이 명륜당에서 향음주례를 열면서 월연을 초빙해 예를 살피게 했다. 월연이 예법에 맞게 향음주례를 실시하도록 하자 감사는 감탄을 하기도 했다. 일찍이 성재에게 예법을 충실히 익힌 월연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의령 이의정에서 ‘미수기언’중간 교정의 일에 참여하였다. 미수기언 중간의 일을 하면서, 미수와 남명선생의 관계를 사숙(私淑)관계로 생각하고 관련된 글을 교정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을사늑약땐 탄식을 하며 자결한 의사들을 기리는 시를 지었으며,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1911년 향교에서 군지(郡誌)를 만드는 일을 주관했다. 이보다 앞서 단성과 진주 일부가 산청군에 속해 산음지를 편찬하는데 고을 인사가 월연을 추대해 일을 주관하게 했다.1914년 형인 남천이 중심이 되어 진양(晉陽)의 연산(硯山) 밑에 지역 선비들과 더불어 도통사(道統祠)를 창건하여 공자 주자 및 안향(安珦)의 영정을 모시고 도학의 부흥을 도모하였는데 함께 참여해 힘을 보태었다. 월연의 형 남천 이도묵 역시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진양지에 "의표가 단정하고 학문이 심수하였으며 존현의 위도에 지극한 정성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월연은 이후 고향에서 경무공을 숭모하는 일을 비롯한 집안 일을 주도했으며, '일두집' 중간의 일에 관여 하는 등 지역 선현들을 기리는 일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러다가 1922년 가을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이다. '진양속지’에 월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자는 경유(경維)요 호는 월연이니 남천(南川) 도묵(道默)의 아우이다. 어려서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문장이 간결하였으며 시에는 더욱 평담(平談)하고 충원(沖遠)하여 모든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문집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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