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0.5*29센치
보내1층14상5
**序: 李源祚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치광자(癡狂子).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최사철(崔師哲)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최정(崔淨)[1528~?]이다. 아버지는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1560~1638]이며, 어머니는 참봉(參奉) 류경준(柳景濬)의 딸 풍산 류씨(豐山柳氏)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승의부위(承義副尉) 이시익(李時益)[1567~1642]의 딸이다. 관봉(鸛峰) 최은(崔))이 그의 형이다
최린(崔轔)[1597~1644]은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인해 집안이 가야산성(伽倻山城)[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으로 피난 갔을 때에 태어났다. 8세 때 형인 최은과 함께 아버지 최항경을 따라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훗날 스승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몸소 염빈(殮殯)[시신을 염습한 뒤 관에 넣어 안치함]을 행할 정도로 사제(師弟) 간의 정의(情誼)가 두터웠다. 이후 1633년(인조 11) 형 최은과 사마시에 동방급제(同榜及第)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마에 열중하였다.
1635년(인조 13) 무고를 당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변호하기 위해 변무소(辨誣疏)를 지었는데, 말뜻이 분명하여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칭찬하였다.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아버지 최항경의 명으로 형 최은과 함께 고령의 의병소(義兵所)로 달려갔으나, 문경(聞慶)에서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이후로 치광자(痴狂子)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면서 종신토록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1638년(인조 16)에 아버지 최항경이 세상을 떠나자, 예에 의거하여 정성껏 장례를 치렀으며, 삼년상이 끝난 후에는 작천(柞川)에다 집을 짓고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피는 매화의 지조에 감탄하여 ‘매와(梅窩)’라 편액하고 이를 자호로 삼았다.최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을 일찍 성취했으나, 8세 때 한강 정구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게 되어, 속유(俗儒)들의 사장학(詞章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스승 정구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는데, 정구가 예서(禮書)를 편집할 때마다 최항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반드시 두 아들과 함께 살펴보라.”라 했던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정구 사후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장현광으로부터 사물(四勿)의 뜻을 들은 뒤에 물자설(勿字說)을 피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