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0*31센치
보내1층20상4
**序: 庚子(?)...趙亨復
刊跋: 閼逢攝提格(1914)...趙鍾弼
**조선 전기 순천의 용강서원에 배향된 문관.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鶴浦),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양팽손은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양팽손은 1488년 능성(綾城)[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출생하였다.
양팽손은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1486~1521]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1519년(중종 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가 되어 중종에게 상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1492~1521]·박세희(朴世熹)[1491~?]·최산두(崔山斗)[1483~1536]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 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양팽손은 1539년(중종 34)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사사당한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1545년 58세로 죽었다.
양팽손은 13세 때 송흠(宋欽)[1459~1547]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1493~1582]·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을 처신의 지침으로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양팽손은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學圃遺集)』 2책이 전한다. 『학포유집』은 시문집으로 1841년(헌종 7)에 양찬영이 편집·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