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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1층19상4
**序: 上之十一年乙巳(1845)...柳致明
跋: 歲乙巳(1845)...呂武聖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문서(文瑞), 호는 송오(松塢). 아버지는 처사 여종호(呂從護)이며, 어머니는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참봉 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여응구(呂應龜)[1523~1577]는 금릉에서 태어나 처가와 가까이 있던 주세붕(周世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혔으며, 당대 석학이었던 오건(吳健), 조식(曺植)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특히 조식을 비롯한 성운해, 성윤해(成允諧)와는 절친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중 보우(普雨)[1509~1565]를 축출하는 데 영남 유림에서 24회 상소를 올릴 때 영남 팔학사로 불리던 여응구는 김우광, 조희 등과 함께 소문을 짓는 데 주도하였다.
1570년(선조 3) 노수신(盧守愼)의 천거로 김천찰방이 되어 영남 교통 요지로 인한 심한 민폐를 덜어 주었다. 1572년(선조 5)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경호(鏡湖) 부근에 정자를 지어 소나무 몇 그루를 심은 뒤 ‘송오(松塢)’라고 자호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송오유집(松塢遺集)』[불분권 1책, 목판본]을 남겼다. 1845년(헌종 11) 10세손 여학조(呂學祖)와 여무성(呂武聖)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치명(柳致明)의 서문과 권말에 무성의 발문이 있다. 세계도(世系圖) 1편, 시 1수, 부(賦) 1편, 소(疏) 3편, 찬(贊) 1편, 제문 1편, 의(疑) 1편, 논(論) 1편, 책(策) 1편, 부록에는 사우증유(師友贈遺) 4수, 만사 2수, 행장 1편, 묘갈명 1편, 상량문 2편, 봉안 1편, 축문 1편, 중수상량문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 세 편은 여응구가 관학생(館學生)으로 있을 때 보우(普雨)를 처참할 것을 청하여 올린 글로, 고려 말의 요승들의 행패를 하나하나 지적한 뒤 지금 보우가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화란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의 1편은 “공자의 문장을 들어서 알지만, 공자가 말한 성(性)과 도(道)는 들어서 알 수 없다”라고 해설한 글이다. 이 밖에도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를 설명한 책이 있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