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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명(李聃命)[1646~170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이윤우(李潤雨)이고, 할아버지는 수찬 이도장(李道長)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원정(李元楨)이고, 어머니는 승정원좌부승지 이언영(李彦英)의 딸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부인은 이석규(李碩揆)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동생은 이한명(李漢命)·이우명(李佑命)이다.
이담명은 1640년(인조 18)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서 태어났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사서육경을 배웠다. 1670년(현종 1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가 되었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어 아버지 이원정의 유배지인 초산에 따라갔다. 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담명은 1690년(숙종 16)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흉년을 당한 백성들의 진휼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었다. 1691년 이임한 뒤 도민들이 이담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 외직에 있을 때에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폐단을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이담명은 1961년부터 부제학·대사헌·대사성을 역임하였고, 1693년에는 이조참판에 올랐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파직되어 창성(昌城)에 유배되었다. 1696년 7월 풀려나 사간이 되었으나 1697년 다시 충청남도 남포로 유배되었다가 1699년 풀려났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시문 등으로 소일하다 1701년 사망하였다
이담명의 저술로는 『정재문집(靜齋文集)』, 『서전차의(書傳箚疑)』, 『기뇌홍(記雷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