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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20.5*31.5센치
보내1층19상2
**序: 壬辰(1772)...李象靖
跋: 上之十七年(1793)...李世澤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거주한 문신.
이해(李瀣)[1496~1550]는 이황(李滉)[1501~1570]의 형으로 문과 급제 후 이조정랑, 사헌부대사헌, 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이해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산부사 이정(李禎), 할아버지는 진성군 이계양(李繼陽),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 어머니는 사정을 지낸 박치(朴緇)의 딸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부인은 통례원가인의를 지낸 김복흥(金復興)의 딸 연안김씨(延安金氏)이다
이해는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계리(溫溪里)[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작은아버지 이우(李堣)[1469~1517]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중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536년(중종 31) 공조정랑·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544년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546년(명종 1) 황해도관찰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1548년 동지중추부사, 1549년 청홍도관찰사, 1550년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하지만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 세력이 득세하면서 유배형에 처하게 된다.
이해는 권신 이기(李芑)[1476~1552]를 탄핵한 적이 있는데, 이때 이기의 심복인 이무강(李無彊)이 도리어 이해를 탄핵하였다. 이해는 유배 가던 도중 양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이산(伊山)은 이해의 처가가 있던 곳이었다. 이해는 혼인 후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지금의 영주 지역에 머무르며 지역의 여러 학자와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