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0.5*32센치
보외1층앵글장36-1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인.
조선 후기 성주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고 인조와 효종조에 활동한 문인이다.본관은 인동(仁同)[옥산(玉山)]. 자는 자유(子裕), 호는 지분헌(知分軒). 증조할아버지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도의로 교제하던 장잠(張潛), 할아버지는 호조참의에 증직된 장곤(張崑)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유생이자 임란 의병장이었던 개옹(翁) 장봉한(張鳳翰)이고, 어머니는 창원 유씨(昌原兪氏)로 유수지(兪遂之)의 딸이다.
선대로는 고려 때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 시조이고, 그 뒤에 덕령부윤 장안세(張安世) 및 김해부사 장중양(張仲陽) 부자가 고려가 멸망 후 물러나 옥산 집에 거주하였다. 조선조에는 장수남(張脩南)이 있다.
장이유(張以兪)[1598~1660]는 1598년(선조 31)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608년 선조가 승하했을 때, 나이 겨우 10세였으나 고기를 먹지 않으며 군신 간의 분수를 지켰다고 한다. 1613년(광해군 5)에 종제들과 함께 인동 종가에서 여러 달 동안 글을 읽으며 공부하였다. 1615년 봄에 예를 갖추어 한강 정구에게 가서 수학하였고, 여름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가서 인사하고 공부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따라 무흘정사에 가서 장례를 치르고, 그대로 머물며 공부하였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고, 1635년(인조 13) 퇴계(退溪) 선생의 무고를 신변하는 소를 지을 때 참여하였다. 1642년(인조 20) 고을에 통문을 돌려 장현광을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천곡서원(川谷書院)에 배향하였다. 1654년(효종 5) 성주군에 작은 집을 지어 ‘지분(知分)’이라 쓴 편액을 걸었다. 지분은 ‘부모된 분수로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된 분수로는 효도해야 하고, 신하된 분수로는 임금을 공경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서, 장이유는 이를 실천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1660년(현종 1)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