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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상3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숙(孝叔, 孝淑), 호는 사옹(槎翁, 査翁).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박잠(朴潛)이고 어머니는 도사 김경(金璟)의 딸이다. 부인은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1551~1599]의 딸로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학연(學淵) 박진구(朴震耉)는 사림으로 명망이 있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과 교유하며 학문적 삶을 살았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출신의 설봉(雪峯) 박찬(朴澯)[1538~?]의 조카이다.
박명윤(朴明胤)[1566~1649]은 1566년(명종 21)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적송리 오인동 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며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1568~1639]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가야산(伽倻山)이 있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봉양리 백양촌으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버지를 지켜내, 적장이 박명윤의 효성에 크게 감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화왕산(火旺山)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항전한 기록이 『용사록(龍蛇錄)』에 들어 있다. 1610년[광해군 2]에 진사에 올랐으나 이후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은거하며 성리학 경전(經傳) 읽기에 몰두하였다. 지극한 효행으로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혼조(昏朝)에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종신토록 초야에 묻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연마하였다. 1649년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