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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상2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이자 의병.
본관은 철성(鐵城)[고성]. 자는 자진(子眞), 호는 야로(野老). 고조할아버지는 병조참판 이억(李嶷), 증조할아버지는 예조참판 이필(李珌)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이우(李佑), 아버지는 공조참판 이언명(李彦明)이다. 어머니는 승지 박훈(朴薰)의 딸이고, 부인은 참봉 이인수(李麟壽)의 딸이다.
이순(李淳)[1530~1606]은 1530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 불무골에서 태어나,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性理)의 요지를 듣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김우옹(金宇顒)[1540~1603]과 도의로 교제하였다. 한강은 이순을 ‘산남 선생(山南先生)’이라 불렀다.
1552년(명종 7) 보우(普雨)[1509~1565]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0년(선조 13) 어사 송언신(宋言愼)에 의해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천거되고, 1590년(선조 23) 다시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천거가 있었으나 세상일이 날로 혼탁하다며 스스로 야로(野老)라고 호를 붙이고 전원에 은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효성이 지극하여 구동골[견곡(堅谷),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 별장을 짓고 작은 단(壇)을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부친 산소를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 이후 산남(山南)[현 선남]으로 이사하여 성주목사 황준량(黃俊良)이 창건한 공곡서당(孔谷書堂)의 원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서당이 불타버리자 다시 목사에게 청하여 복구하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야로당문집(野老堂文集)』 2권 1책이 전한다. 세보(世譜)에 『성리휘집(性理彙輯)』이 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는다.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 삽실 건좌(乾坐)[남동향] 언덕에 있다.
1713년(숙종 39) 유계서원(柳溪書院)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