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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상2
**권정(權定)[1353~1411]은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고향에 은둔한 문신이다.
권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안지(安之)이며, 호는 사복재(思復齋)이다. 할아버지는 중랑장을 지낸 권수영(權守英), 아버지는 부사를 지낸 권현(權顯)이다. 아들로는 권조(權照), 권요(權曜)[1379~1460], 권서(權曙), 권시(權時)가 있는데, 둘째 아들 권요가 영주의 토족인 생원 민의(閔毅)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서, 권요의 후손들이 영주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권정은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괴산군수, 좌사간 등을 지냈다. 하지만 국정에 대한 기탄없는 직간으로 권신들에게 미움을 사 김해부사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1392년(태조 1) 고려가 멸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반구정(伴鷗亭)과 봉송대(奉松臺)를 짓고 은거하였다. 반구정은 옛날을 돌이킨다는 ‘반구정(返舊亭)’으로도 썼으며, 봉송대는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를 받든다는 의미로 모두 권정의 절의 정신을 보여주는 이름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와 태종이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절의를 지킨 권정의 행적을 기리며, 권정이 살았던 마을을 ‘기사리(棄仕里)’라고 불렀다.
권정의 저서로 2권 1책의 『사복재실기(思復齋實記)』가 전한다. 권1에는 가장(家狀), 행장(行狀) 등의 전기류가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반구정, 구호서원 등 권정의 유적 및 추모 시설과 관련된 글들을 수록해 놓았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영주에 세거하던 후손들이 반구정을 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으로 이전하였다. 1780년(정조 4)에는 영주 지역 사림들의 공의로 구호서원[영주시 영주동]에 제향하였다. 구호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