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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5상
**被傳者: 李濟臣(1536-1583)
序: 丁未(1907)...李承熙
跋: 崇禎紀元後六丁未(1907)...張升鐸
刊記: 丁未(1907)...六月日開刊寒泉亭藏板
**경기도 가평군에 있었던 미원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이제신(李濟臣)[1536~1583]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자는 몽응(夢應)이고, 호는 청강(淸江)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예원 판결사 이시보(李時珤), 할아버지는 양주목사 이공달(李公達), 아버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문성(李文誠)이다.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 禹氏) 우예손(禹禮孫)의 딸이고, 부인은 목천 상씨(木川 尙氏) 상붕남(尙鵬南)의 딸이다.이제신은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명종 19) 선교랑(宣敎郎)으로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1566년(명종 21) 예문관 검열(檢閱)에 제수된 뒤, 대교(待敎)·봉교(奉敎)를 거쳐 1568년(선조 1)에는 성균관 전적(典籍)·형조 정랑·호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사직(史職)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9년(선조 2)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70년(선조 3) 울산군수로 부임하여 아전들의 탐학을 근절시키려 노력하였다. 1572년(선조 5) 파직되었다가 1573년(선조 6) 복직하여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성균관 사예(司藝)·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암행어사로 호서 지방을 순행하였다.
1574년(선조 7) 이후 부모를 돌보기 위해 외직에는 나가지 않고 내직으로 성균관 직강(直講)·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부모의 상을 모두 치르고 1578년(선조 11) 복귀하여 사복시(司僕寺) 첨정·사간원 사간을 거쳐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토호들의 모함으로 파면되었다. 1580년(선조 13) 다시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부임하였고, 1582년(선조 15)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583년(선조 16) 여진족의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지금의 함경북도 경원군]가 함락되자 의주(義州)[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었다이제신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 『청강집(淸江集)』, 『진성잡기(鎭城雜記)』 등이 있다.이제신의 묘와 신도비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다. 묘는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는 1621년(광해군 13) 건립되었고, 비문은 신흠(申欽)이 지었다.이제신은 1585년(선조 16) 경연관 이우직(李友直)의 청으로 신원되어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청백리에도 녹선(錄選)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의 송천서원(松泉書院)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던 미원서원(迷原書院)[지금의 경현단]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