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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5상3
**被傳者: 朴弘長
序: 昭陽赤奮若(1973)...金榥
跋: 癸丑(1973)...曺圭喆 ; 都載漢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무신.
박홍장(朴弘長)[1558~1598]은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했으며, 대구부사(大丘府使) 등을 지냈다.
박홍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임(士任), 호는 농아당(聾啞堂)이다. 무안박씨 영덕 입향조 박지몽(朴之蒙)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현감 박세렴(朴世廉),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부인은 경주손씨(慶州孫氏) 직장 손보의 딸이며 그 사이에서 딸 2명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병사(兵使) 박의장(朴毅長)이 친형이다.
박홍장은 23세 때인 1580년 무과에 급제한 뒤 평안도 병사 이전(李戩)과 북병사 이일(李鎰)의 군관을 지냈으며, 선전관을 거쳐 1589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제주판관 부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제주 지역 조방장(助防將)에 선임되었다. 조방장 재직 중 전쟁 대비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어 영암군수를 지냈으며, 류성룡의 추천으로 대구부사에 임명되었다. 1596년 5월 조정에서는 강화(講和) 일환으로 왜에 통신사를 선발했는데 황신(黃愼)과 함께 파견되었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기개 있는 처신을 보여주었다. 당시 통신사 일행의 4개월의 일정을 기록한 『동사록(東槎錄)』이 전한다. 귀국 직후 순천부사·상주목사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41세에 사망하였다.
박홍장의 묘갈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지었으며, 묘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묘곡리 초소곡에 조성되어 있다.
1665년 지역 사림의 공론에 힘입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서쪽 구봉산(九峯山) 아래에 정충사(精忠祠)를 지어 박홍장의 공덕을 추모하였다. 1785년 정충사는 구봉서원(九峰書院)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