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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5상3
**조선 후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무신.
김응하(金應河)[1580~1619]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김지사(金地四)이다.
김응하는 1580년(선조 13)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고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다고 한다. 1594년 임진왜란 중에 부모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뒤 한탄강 상류 칠만암 주변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수련하며 무과 시험을 준비하였다.
김응하는 1604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에게 발탁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1605년 여러 사람의 질시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승종의 비장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하였다. 1610년 다시 선전관이 제수되었으며, 이후 경원판관으로 부임한 뒤 삼수군수와 북우후를 역임하였다.1618년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 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의 좌영장으로 있다가, 1619년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 김응하는 심하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자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6만 명의 후금 군대에 맞서 고군분투하다가 힘에 부쳐 전사하였다.
김응하의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의 빈장산에 있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신종(神宗)은 김응하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가족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김응하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90번지에 있는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