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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 초명은 한몽인(韓夢寅)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한성판관을 지낸 한사무(韓士武)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돈암(遯庵) 한승리(韓承利)이며, 할아버지는 성균관사성을 지낸 한여철(韓汝哲)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여한 한계(韓誡)이며, 어머니는 현감 허주(許鑄)의 딸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부인은 참봉 장익기(張益祺)의 딸 창녕 장씨(昌寧張氏)이며, 그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한몽삼(韓夢參)은 20세 되던 1608년(선조 41)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24세 때 삼가(三嘉)에서 열린 문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이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경의(敬義) 사상과 벼슬에 대한 출처(出處)를 중시하였다. 30세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정구는 한몽삼의 아버지 한계가 종유했던 인물로, 한계는 정구를 스승의 예로 대하고 정구는 한계를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38세에 황암의 손자인 농은(農隱) 박도원(朴道元),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등과 함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627년(인조 5) 부사 성여신과 함께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가서 『남명집(南冥集)』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639년(인조 17) 학행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형 한몽룡(韓夢龍)의 권유로 이듬해에 부임하였지만 3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부모처럼 의지하던 형 한몽룡과 사촌형 한몽일(韓夢逸)이 차례로 사망하자, 세상에 뜻을 잃고 함안군 원북으로 옮겨가 석정(石亭)이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1647년(인조 25) 함안군 적암(適嵒)에 집을 짓고 이사하여 ‘적암조은(適嵒釣隱)’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다시 함안군 양촌(陽村)으로 이거하였다. 1661년 고향인 진주 정수리(丁樹里)[현 진주시 이반성면 정수리]로 돌아와 이듬해인 1662년(현종 2)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강우지역의 제현들과 함께 여러 차례 화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를 유람하였다. 당시 함께 유람한 이들은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노파(盧坡) 이흘(李屹), 창주(滄洲) 하증(河憎), 사호(思湖) 오장(吳長), 능허(凌虛) 박민(朴敏), 봉강(鳳岡) 조겸(趙), 동계(東溪) 권도(權濤), 매촌(梅村) 문홍운(文弘運),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창주(滄洲) 허돈(許燉),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추담(秋潭) 정위(鄭頠) 등이다.
문집으로 『조은집(釣隱集)』 4권 2책이 있다. 쌍계사에서 여러 벗들과 어울려 시흥을 즐길 때 남긴 시 「쌍계사」는 다음과 같다.“시냇물 맑고 산은 다시 깊어/ 절간은 골짜기에 빼어났다/ 서로 보니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이야기가 한밤중에 이르니 달이 뜨네.”
처음에는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사녕동에 안장했다가 1706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로 이장하였다. 흥룡리 흥룡마을 모퉁이 오른편 길가 산기슭에 묘비가 있다.
1702년(숙종 28)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729년(영조 5)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