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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5상1
**跋: 庚午(1930)...吳震泳
跋: 柔兆困敦(丙字.1936)...田璣鎭
**조선 말기~근대기의 문신이며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 · 추담(秋潭) · 간재(艮齋) · 고옹(蠱翁) · 양하왕인(陽下尫人), 초명은 경륜(慶倫) · 경길(慶佶),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전녹생(田祿生)의 16대손이고, 부친은 전재성(田在聖)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어 사대부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854년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 · 삼청동 · 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다. 이 때부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하여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 · 전의 · 연기 · 진천 · 상주 · 문천 등지로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여 윤치중(尹致中) · 서정순(徐廷淳) 등과 함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후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이(理)는 무위(無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기(氣)가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이의 명덕지시본심(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심즉기(心卽氣) · 명덕시기설(明德是氣說)을 주장했다. 또한 이이의 심위기주(心爲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 · 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고 성존심비(性尊心卑) · 성사심제(性師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많이 제창했다.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했는데, 이는 스승 임헌회가 몸담았던 낙론계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이렇듯이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는다. 그러나 처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추담별집(秋潭別集)』에서 국치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학문을 이루어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했고, 국권을 회복한다고 외세와 손을 잡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이라는 논지로 반박했다.관직은 1882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 감역 ·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 강원도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 ·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해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소(疏)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갔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안자편(顔子篇)』, 『오현수언(五賢粹言)』, 『연원정종(淵源正宗)』 등 6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계화도 계양사(繼陽祠) · 의령 의산사(宜山祠) · 고창용암사(龍巖祠) · 정읍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 『간재사고(艮齋私稿)』, 『추담별집(秋潭別集)』 등이 있다.글씨를 잘 썼다. 초서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손과정(孫過庭)이 쓴 《서보(書譜)》의 서풍을 따랐으며 골기가 있는 강건한 필체를 구사하였다. 강한 필획에 기개높은 학자로서의 면모와 문기가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