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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3-1-2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의 유학자.
강익(姜翼, 1523~1567)은 경상남도 함양군 효우촌(孝友村)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현감을 지낸 강이경(姜利敬), 조부는 현감을 지낸 강한(姜漢)[1454~?], 부친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낸 강근우(姜謹友)이다. 모친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이다.
강익은 어린 시절 경상남도 함양에서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1488~1547]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49년(명종 4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한두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출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모친 역시 강하게 권하지 않아 독서하면서 모친을 봉양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화림동에 유람을 오자 조식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2년(명종 7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 건립을 시작하였다. 강익은 1553년 32세 때 지리산[높이 1.915.4m]을 유람하다 지리산 북쪽 등구동(登龜洞)이 좋아 토지와 가옥을 구입하였으며, 집을 양진재(養眞齋)라 이름하여 세거지로 삼았다. 1554년(명종 9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에 들어가 조식을 뵙고 수개월 동안 강론하였으며, 이후에도 조식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여창을 기리는 서원은 1561년 완성되었으며, 1566년(명종 21년) 영남 유생들과 더불어 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명종으로부터 남계(濫溪)라는 사액을 받았다. 1567년(명종 22)에 추천 받아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사하였다. 향년 45세였다
강익의 문집으로 『개암집(介庵集)』이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묘소가 있다.
1660년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