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0.5*30.5센치
보외1층앵글54-1-5
**序: 孔紀2465(甲寅1914)...李承熙
跋: 蔣昌鉉
表題: 洗心亭集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효자.
장희적(蔣熙績)[1627~1705]의 본관은 아산(牙山), 자는 현재(顯哉), 호는 세심정(洗心亭)·회옹(悔翁)이다. 1627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 의병장인 장문익(蔣文益)[1596~1652]이다. 장문익의 자는 명보(明輔), 호는 조경당(釣耕堂)이다. 장문익은 목장흠(睦長欽)에게 사사하였고, 창원 낙빈(洛濱)에서 지내면서는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號召使)로 의병을 총괄하던 스승 장현광에게 발탁되어 12읍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장희적은 양부(養父) 장문진(蔣文晋) 앞으로 출계(出系)하였다. 동생은 장희백(蔣熙伯)이고,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조카는 손시구(孫是構)이다
장희적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품이 따스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652년 아버지 조경암의 상을 당하자, 애통해하며 무덤 옆에 초려(草廬)를 짓고 묘소를 정성껏 보살펴서 사람들로부터 하늘이 낳은 효성이라 칭송받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동생 장희백을 부탁한다는 말을 받들어 동생이 학문에 마음을 다하도록 잘 이끌었고, 두 형제가 모두 문학과 필법에서 이름을 얻었다. 장희적은 1672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상례를 갖추어 밤마다 통곡하여, 사람들이 모두 효성을 우러러 공경하였다.
장희적은 동네 안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양곡 수십 석을 내었고 이로부터 인근 사람들에게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미풍양속을 실천하였다고 칭송받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창안백발(蒼顔白髮)의 풍모로 평지신선(平地神仙)이라 불리었다.
장희적은 1705년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장희적의 저서로는 『세심정집(洗心亭集)』 3권이 전한다
장희적의 묘소는 삼랑진읍 숭진리 선산에 있다.
장희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장희적의 호를 따서 세심정(洗心亭)이라 편액하였다. 지금의 삼랑진읍 숭진리에 있는데, 숙종 대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1925년과 1976년에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