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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21*31.5센치
보외1층앵글54-1-5
**被傳者: 李長坤
序: 聖上八年(1784)...蔡濟恭
跋: 上之八年(1784)...安鼎福
續編跋: 歲甲戌(1934)...權相翊
刊記: (續跋)正祖八年(1784)初刊...行于世一百五十餘年...甲戌(1934)
**조선 전기 본관이 벽진인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10대조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낸 이견간(李堅幹)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신지(李愼之)이고,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를 지낸 이호겸(李好謙)이다. 아버지는 한성 참군(參軍) 이승언(李承彦)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형은 이장길(李長吉)이다.
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형 이장길(李長吉)과 함께 어려서부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02년(연산군 8)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마시 합격 후 입학한 성균관에서 음애(陰厓) 이자(李耔)[1480~1533] 등과 가까워졌다. 1504년(연산군 10) 교리로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이장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 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楊水尺)[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 무리에 숨어 지낸 이야기는 유명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복권되었다.
1510년(중종 5)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1512년(중종 7) 중국 산동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짐작하고 비변사에 보고하여 이를 방비하도록 건의하였고, 7월에 야인(野人) 2,000명이 창성(昌城)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쳐부수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4년(중종 9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발생에 관련되기도 하였지만 기묘사화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기묘사화에서 중심 역할을 한 심정(沈貞)[1471~1531]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경기도 여강(驪江)과 경상도 창녕[현 경상남도 창녕군]에 은거하였다.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관료였지만 사림들과 교유하며 사림에게 우호적이었다. 문집으로 『금헌집(琴軒集)』이 있다
묘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산6번지에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후천리에 있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신도비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1781년에 지은 것이다. 행장 역시 이상정이 지었다. 묘에서 남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위패를 둔 금호재(琴湖齋)가 있다. 시호(諡號)는 정도(貞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