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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1-3
**刊記: 星州月會堂印刊
序: 閼逢攝提(甲寅, 1914)...張錫英
跋: 歲甲寅(1914)...張升澤
**조선 후기 성주가 본관인 문인이자 학자.
만년에 대덕산(大德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덕은(德隱)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를 멀리하였으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본관은 성산. 자는 순여(順汝), 호는 운산(耘山)·계암(溪菴). 당나라의 학사로 황소(黃巢)의 난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여어매(呂禦梅)가 시조이다. 이름이 드러난 조상으로 기묘현량과(己卯賢良科)에 올라 일지평(逸持平)을 지내고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된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여제광(呂齊光)이고, 할아버지는 문장과 덕망으로 추중(推重)된 소미(少眉) 여의일(呂宜一)이며, 아버지는 여문행(呂文行)이다. 어머니는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1517~1572]의 후손이고 임양식(林養植)의 딸인 은진 임씨(恩津林氏)이다.
여대표(呂大驃)[1802~1869]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서 태어났다.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는 경사(經史)[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아울러 이르는 말]를 널리 보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 같은 병서를 보았다. 과거장에 나갔으나 불공정함을 보고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30세가 되어 안동[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으로 가 정재 유치명의 문하에서 학문의 정수를 배우고 돌아와서 책상에 모든 책을 치우고 『주서절요(朱書節要)』,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같은 책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성주의 응와 이원조, 성주의 학자들과 교분이 두터운 성재 허전,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신암(愼菴) 이만각(李晩慤)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있었다. 정재 유치명이 우정(愚亭)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기획을 담당하였고,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을 모시는 의령의 미연서원(嵋淵書院) 건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의식(儀式)을 결정하고 학규(學規)를 수립하였다. 이종혁(李種赫)이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할 때 손님으로 초대하였으나 사양하였고, 관찰사 신석우(申錫雨)가 낙육재(樂育齋) 강장(講長)으로 초빙할 때는 응하였다.
문집으로 『덕은문집(德隱文集)』 2권 1책이 있다
묘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산역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