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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1-3
**被傳者: 曺尙治(生沒年未詳)
序: 朴永元: 上之六年 甲寅(1854)...李漢膺
跋: 李彙寧: 閼逢涒灘(1944)...十八世孫 現
刊記(推定): ...(初刊序)...上之六年甲寅(1854).... (重刊跋)...梓行于世僅百年而復此重刊...閼逢군灘(1944)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강원도 철원 지역에 은거하였던 문신.
조상치(曺尙治)[?~?]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단고(丹皐),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객령 조수(曺隨)이고, 할아버지는 좌정승 조익청(曺益淸)이다. 아버지는 강계병마사 조신충(曺信忠)이며, 어머니는 판서 최중연(崔仲淵)의 딸 영천최씨(永川崔氏)이다. 부인은 목사 김천일(金千鎰)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이고, 아들은 조변흥(曺變興)·조변륭(趙變隆)·조변안(趙變安)·조변강(曺變康)·조변정(曺變正)·조변옹(曺變雍)이다.
조상치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419년(세종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재감주부가 되었다. 1424년 좌정언에 임명되어 집현전에서 지냈고, 세종·문종·단종 3대를 섬겨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1455년(단종 3) 집현전부제학에 발탁되었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뒤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김시습(金時習)·박제(朴濟)·박도(朴渡)·박규손(朴奎孫)·박효손(朴孝孫)·박천손(朴千孫)·박인손(朴璘孫)·박계손(朴季孫)과 함께 철원에 은거하였다. 조상치 등은 김화의 초막동에 숨어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부르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조상치는 이후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조상치의 저서는 사망하기 전 모두 불태워 전하지 않는다. 관련 저서로는 후손인 조석우(曺錫雨)가 1854년(철종 5) 간행한 『정재실기(靜齋實記)』가 있다.
조상치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어방리에 있다.
조상치는 1791년(정조 15)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에 안장되었다. 조상치의 묘비에는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의 묘[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라고 새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히며 충절을 기렸다. 조상치는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있는 구은사(九隱祠)에 배향되었고, 구은사에서는 매년 조상치 등 구의사(九義士)의 충절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