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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54-1-1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아명(兒名)은 김효동(金孝童),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다.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김유(金紐), 어머니는 청성군(淸城君) 한승순(韓承舜)의 딸 숙부인(淑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자신을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자처하였다. 김굉필이 『소학』 이외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30세 이후였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인해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 순천 지역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리고 1504년 갑자사화로 유배지 순천에서 죽었다.
김굉필이 5년간 순천 지역에 머물면서 순천 지역 사족들에게 끼친 학문적인 영향은 매우 컸다. 당시 순천 지역에 거주하던 류계린(柳桂隣)[1478~1528], 류맹권(柳孟權), 장자강(張自綱)[1461~1526] 등이 김굉필에게 사사하였다. 이후 순천 지역의 성리학은 그 근원을 김굉필에서 찾게 되었다. 1563년(명종 18)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정(李楨)[1512~1571]은 김굉필 관련 사적을 대폭 정비하는 한편 『경현록(景賢錄)』을 간행하였다. 16세기 이후 순천 지역에 입향한 신흥사족들은 이정의 이러한 성리학 진흥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차 순천 지역 향권(鄕權)[향소(鄕所)의 권리나 권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학문적인 연원을 김굉필에서 찾았다.
김굉필은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에 치중하였고, 소학을 강조했던 만큼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를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현실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저술로는 『경현록』과 『가범(家範)』 등이 전한다.
김굉필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1-1에 있다.
김굉필은 1507년(중종 2) 신원 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1517년(중종 12)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議政府右議政兼令經筵事)에 추증되었다. 1575년(선조 8)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1450~1504]·조광조(趙光祖)[1482~1519]·이언적(李彦迪)[1491~1553]·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사적 제488호]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