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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7-1-4
**序: 歲癸卯(1963)...李瑢發
後識: 昭陽單閼(1963)...朴永鎭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문신.
박신지(朴身之)[1629~1705]는 1675년(숙종 1) 문과 급제 후 예조정랑(禮曹正郎)·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박신지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이경(履卿), 호는 소호(小湖)·택옹(澤翁)이다.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1287~1349]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박희맹(朴希孟), 어머니는 강릉박씨(江陵朴氏)이며, 부인은 진성이씨(眞城李氏)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박신지는 1629년(인조 7)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인량리(仁良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입격했고, 46세 때인 1675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사환의 길에 들어섰다. 다음 해 훈도를 시작으로 성균관박사·전적(典籍)·사헌부감찰·공조좌랑·예조정랑 등의 내직과 보령(保寧)·서산(瑞山)·울산부사 겸 경주진관병마절제사(慶州鎭管兵馬節制使)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울산부사 재임 시절 동헌 벽에 ‘시민여상(視民如傷)[백성 보기를 마치 아픈 사람인 것처럼 한다]’라는 네 글자를 게시해 선정을 펼치고자 노력하였다. 이임 후에는 울산 백성들이 박신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83년(숙종 9)에는 인량리 동규(洞規)의 중수 서문을 작성하였다
박신지는 어려서 큰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고, 15세 때 안동에 살던 남곡(南谷) 권상길(權尙吉)에게 수학하였다. 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 형제와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소호집(小湖集)』, 『택옹유집(澤翁遺集)』, 『용계재유고(龍溪齋遺稿)』가 전한다.
김정모(金正模)가 지은 행장에 따르면 경상도 영양현 북쪽 장파구은동(長坡龜隱洞)에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호수가 있는 정자인 소택정(小澤亭)을 지어 소요처로 삼았다. 소택정은 박신지의 호인 소호(小湖)와 택옹(澤翁)의 앞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