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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19*28.5센치
보외1층앵글47-1-3
**序: 歲丁卯...李能允
序: 徐命源
後識: 徐永敎
**서섭(徐涉)[?~?]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남은(南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均衡)이고, 할아버지는 서침(徐忱)이다. 아버지는 광흥창부승(廣興倉副承) 서문한(徐文翰)이다. 부인은 예조참의 채윤(蔡崙)의 딸 인천채씨(仁川蔡氏)이고, 아들은 서진원(徐震元)·서감원(徐坎元)·서간원(徐艮元)이다. 형은 서제(徐濟)·서도(徐渡)이다.
서섭은 세종(世宗) 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 문종(文宗) 대와 단종(端宗)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다. 관직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유배하자, 서섭은 간신들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을 등용하라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다. 1457년 단종이 사망하자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이라는 시를 남기고 낙향한 후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다.
서섭과 형 서제의 충절은 한동안 숨겨져 있었는데, 1920년 후손 서의곤(徐義坤)이 집을 수리하다가 서섭의 유고(遺稿)와 행장(行狀)을 발견하여 『남은선생문집』으로 출판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서섭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다
서섭은 사망한 뒤 무주의 분양서원(汾陽書院)과 영일의 중양서원(中陽書院), 대구의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덕산서원에는 서섭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