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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22*31센치
보외1층앵글47-1-2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군필(君弼), 호는 괴담(槐潭). 여말선초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배행목(裵行睦), 아버지는 배집(裵緝),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경여(權慶餘)의 딸이다
배상열은 1760년 안동부(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2리 녹동)에서 태어났다. 5~6세에 이미 글을 읽고 썼으며, 온순하고 단아한 용모와 성품을 가졌다. 일찍부터 천지조화와 우주의 이치에 관심을 가져 11세에 어느 스승에게 수학하러 갔다. 그 스승이 배상열의 능력을 파악하려고 글을 지으라고 하자 즉석에서 “수금목토수 인의예지학(水土木金修 仁義禮智學)”이라 답하여 온 좌중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이후로 신동, 귀재로 찬사를 받았다. 15세에 『역학계몽(易學啓蒙)』, 『율려신서(律呂新書)』 등의 천문·역학 서적을 탐독하여 상수학(象數學)에 깊은 조예를 가지게 되었다.
21세에 안동부 일직현(一直縣) 소호(蘇湖,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퇴계학맥의 주요 계승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상정은 “그대는 천문·성력(星曆)을 먼저 했으니, 이제는 마땅히 도학(道學)을 공부하라.”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대학(大學)』을 연구하면서 일취월장하여 일가의 경지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 『사서찬요(四書纂要)』 등이 저술되었다.
이상정과 이기(理氣)와 의리지학(義理之學) 등에 관해 질의와 토론을 주고받았으며 그 내용은 『호상종학록(湖上從學錄)』에 남기고 있다. 그 뒤 29세에는 이상정이 이미 죽은 뒤여서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배상열은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는 풍류처사이기도 하면서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산수를 즐겨 집 근처 괴화나무 아래에 작은 연못을 파고는 직방당(直方塘)이라는 이름을 짓고 늘 여기에서 독서하였기 때문에 배상열은 ‘괴담처사(槐潭處士)’라고 불렸다. 1789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