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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7-1-2
**序: 庚辰(1940)...金寗漢
[跋]: 庚辰(1940)...[芮]鍾穆
**근대 청도 출신의 학자.
예대희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자 1912년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이승희·맹보순과 함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했고, 이승희와 함께 공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한인 공교회 지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본관은 의흥(義興), 자는 국언(國彦), 호는 소남(小南)·희재(希齋)·이산(伊山). 증조할아버지인 예지열(芮之烈)은 성담 송환기(宋煥箕)에게서 수학하였다. 아버지는 예동채(芮東彩)이고, 어머니는 청도 김씨 김경권(金景權)의 딸이다.
예대희(芮大僖)[1868∼1939]는 1898년부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1839∼191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송병선과 송병순 두 선생은 순국으로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에 예대희는 망명을 결심하고 1912년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국권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청도 유림의 대응 방식은 순국이나 의병보다는 은둔과 망명·친일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 예대희는 망명을 택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예대희는 이승희(李承熙)[1847∼1916], 맹보순(孟輔淳)[1862∼1933] 등과 함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했고, 이승희와 함께 공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한인 공교회 지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16년 귀국하여 공주 명암리(鳴岩里)에 정착하였고, 1939년에 생애를 마쳤다.
예대희는 청도의 학자로는 특이하게 망명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작품에서 학자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지만, 나라를 잃은 망명객으로서의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심회(心懷)를 직설적으로 표출한 작품이 상당 부분 남아 있어 주목된다. 문집으로는 1940년에 간행된 석판본 『이산 문집(伊山文集)』 8권 4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