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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7-1-2
**고려 후기 밀양 출신의 문신.
박익(朴翊)[1332~1398]의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초명은 박천익(朴天翊)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대화(朴大和)이고, 할아버지는 병부참정 박간(朴幹)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 박영균(朴永均)이며, 어머니는 좌정승 구위(具褘)의 딸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배현보(裵賢輔)의 딸 성산배씨(星山裵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판사 류인기(柳仁杞)의 딸 고흥류씨(高興柳氏)이다. 아들은 박융(朴融)·박소(朴昭)·박조(朴調)·박총(朴聰)이다.
박익은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밀양에서 태어났다. 1352년(공민왕 2) 과거에 급제하여 소감·예부시랑·중서령·세자이사·예문춘추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의 막하에서 홍건적과 여진족 토벌에 전공을 세웠고, 우왕 때도 이성계를 도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박익은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재(歸隱齋)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태조가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이듬해인 1396년 좌의정을 제수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박익은 이후 고향인 밀양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사망하였다.
박익의 저서로는 1837년(헌종 3)에 간행된 4권 1책의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박익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134에 있다. 분묘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중세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박익은 사망한 뒤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밀양 초동에 있던 덕남서원(德南書院),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의 용강서원(龍岡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의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