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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4상1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로서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고 성주에서 생장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로서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으나 유일로 천거되어 선조 13년(1580) 창녕 현감, 사헌부 지평, 1584년 동복 현감을 역임하고 1585년 교정청 교정랑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 군수를 지내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1594년부터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 충주 목사, 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하였고 그후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경학, 병학(兵學),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다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심경발휘(心經發揮)》, 《심경후론(心經後論)》, 《고금충모(古今忠謨)》, 《고금치란제요(古今治亂提要)》, 《의안집방(醫眼集方)》, 《광사속집(廣嗣續集)》, 《함주지(咸州誌)》, 《성현풍(聖賢風)》, 《태극문변(太極問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무이지(武夷志)》,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와룡지(臥龍志)》, 《역대기년(歷代紀年)》, 《경현속록(景賢續錄)》, 《관의(冠儀)》, 《혼의(婚儀)》, 《장의(葬儀)》, 《설의(愆儀)》, 《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선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