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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4상1
**본관은 벽진(碧珍). 자(字)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운계(雲溪). 증조할아버지는 성균 진사(成均進士) 이인손(李麟孫), 할아버지는 학생 이운(李運)이다. 아버지는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이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최호(崔湖)의 딸이다.
이언영(李彦英)[1568~1639]은 1568년(선조 1) 경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 석전리[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서 태어났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 식년과(式年科)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그 뒤 십년간 내직으로는 병조와 형조의 좌랑을, 외직으로는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 태복시 첨정(太僕寺僉正)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때 영창대군의 원사(寃死)를 항의하다 역적으로 몰린 정온(鄭蘊)을 변호하다 호역(護逆)이란 죄목으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되고 10년 금고형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직되어 직강(直講), 사예(司藝), 내자시정(內資寺正), 장령(掌令)을 지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서명하지 않아 녹훈되지 못했다가, 훗날 알려져 특별히 절충장군(折衝將軍)에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인조 2)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분조(分朝)[세자가 거느리는 조정]를 따라 전주에 갔고, 1628년 밀양부사, 1630년(인조 8) 청주목사, 1633년(인조 11) 선산부사를 역임하였다.
지방관 재임 중에는 특히 흥학(興學)을 도모하고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굴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환 중임에도 침식을 전폐하고 통곡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 낙동강 변 완암(浣巖) 위에 완석정(浣石亭)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다가 2년 뒤인 1639년(인조 17)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 이언영 종택이 있다.
『완정집(浣亭集)』 8권 4책이 있다.
상도 인동부 약목현(若木縣)[현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지역] 두만산(斗巒山)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현재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산80번지 촌후산(村後山) 동남쪽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