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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앵글44상1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학자.
권창진(權昌震)[1597~1683]은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권창진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동언(東彦), 호는 아맹(亞盲)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권덕영(權德榮), 어머니는 첨정을 지낸 남계홍(南繼洪)의 딸 숙부인 영양남씨(英陽南氏), 할아버지는 진사 권계옥(權啓玉), 증조할아버지는 훈도를 지낸 권봉년(權鳳年)이다. 부인은 이성(李珹)의 딸 증 숙부인 공주이씨(公州李氏)이다.
권창진은 1597년(선조 30)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지금의 영주시 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박성범(朴成範)·박회무(朴檜茂)[1575~1666]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은 쌀과 포목을 체찰영에 보낸 뒤 해산하였다.
권창진은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죽령을 넘어 청풍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권창진은 스스로 호를 ‘아맹(啞盲)’이라 하였다. ‘아맹’이라는 호는 벙어리와 같이 세상일을 말하지 않고, 소경처럼 하늘을 보지 않은 채 은둔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권창진은 1649년(인조 27) 아버지 권덕영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제(禮制)에 따라 정성껏 상을 치렀다. 김응조(金應祖)[1587~1667]와 이상언(李尙彦)[1597~1671]이 학문과 행실로써 권창진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677년(숙종 3) 수직(壽職)을 받아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랐다.
권창진의 문집으로 2권 1책의 『아맹일고(啞盲逸稿)』가 전한다.
권창진의 묘소는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에 있다.
권창진은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813년(순조 13) 지역 사림의 공의로 권두문(權斗文)[1543~1617]·김대현(金大賢)[1553~1602]·김봉조(金奉祖)[1572~1630] 등과 함께 구호서원(鷗湖書院)[영주시 영주동]에 추향되었다. 구호서원은 1780년(정조 4) 권정(權定)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인데,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지금까지 복설되지 않았다. 한편, 구성공원 내에 있는 대은정(大隱亭)은 후손들이 권창진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누정으로 1961년 현재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